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7일(현지 시각) 워싱턴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관련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아예 질문도 받지 않았다. 케리 장관은 "한·미 동맹은 '한 치의 빛'도 들어올 틈 없이 단결돼 있다"고 했지만 이날 회담이 관심을 모은 것은 '아베의 폭주'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말 아베 총리가 2차대전 전범(戰犯)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를 참배하자 국무부 대변인이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 후엔 이 수위를 벗어나지 않는 형식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지난 6일엔 "대화를 통해 이견을 해소하는 것이 역내(域內) 모든 국가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했다. 아베는 지난 6일 신년 회견에서 "한국·중국 등에 평화헌법 개헌 문제를 설명하면 (그들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7일엔 야스쿠니에서 전범을 분리할 수 없다고도 했다. 한·중이 뭐라든 제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미국은 이런 아베와 어떤 대화로 이견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미·일은 동맹 관계다. 동맹국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미국이 조용한 방식으로 아베의 행동을 억제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동북아 외교·안보 문제를 분리한다는 미국의 방침으로 볼 때 미국 정부가 아베의 폭거를 사실상 묵인하고 넘어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국은 일제 침략의 최대 피해국이다. 식민 지배가 지금의 분단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런 국민을 향해 침략 역사를 부인하는 일본과 안보 문제에서는 손을 잡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고 비현실적이다. 만약 독일 정치 지도자들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전범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나치의 침략 전쟁을 부인할 경우 유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유럽공동체 자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은 그 경우에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과거사와 안보 문제를 분리해 독일과 손잡으라고 할 것인가.
일본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래서 일본의 탈선은 미국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이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30여만 미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미국이 재정 적자 때문에 아시아에서 일본이 다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게 된 사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일본의 침략 전쟁 부인까지 묵인하는 것은 미국의 가치에도 맞지 않는다.
동북아에서 한·미·일 안보 공조는 미국이 일본의 폭주에 제동을 거느냐에 달린 문제다. 미국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한 한·일 갈등은 장기화할 수밖에 없고, 한 치의 빛도 들어올 틈이 없다는 한·미 동맹에까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국이 일본 과거사 문제에서 제3자가 아니라 당사국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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