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의 태평로] '스펙' 쌓느라 우리가 놓치는 것들

    입력 : 2013.12.26 05:33

    강인선 국제부장
    고등학교 1학년 딸을 둔 지인은 최근 특정 학과 졸업자들이 어떤 분야에서 주로 일하는지 알아보고 있다. 졸업 후 취업 전망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장래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본 후 거기에 맞춰 그 학과에 지원할 때 도움이 될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녀 교육에 워낙 열성인지라, 딸이 희망하는 전공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스펙(취업·입시에 필요한 평가 요소로 specification의 약자)과 스토리를 추가하느라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사정은 미국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대입 원서 쓸 때 자기 소개서를 차별화할 길이 없다고 한탄이다. "티베트에서 태어나든지, 타임머신 타고 가서 남북전쟁에 참전하고 오기 전엔 남다르게 보일 방법이 없다"는 우스개까지 돈다.

    취업이나 입시를 위해 다양한 기준을 고려하는 건 시험 성적 딱 하나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정형화되다 보니 정말 중요한 건 못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를테면 지난주 가짜 폭발물 신고로 보스턴을 테러 공포에 몰아넣었던 한국계 하버드대생 말이다.

    그는 고교 시절 수학 성적이 뛰어났고 네팔과 페루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했고 모 연구소 주최 작문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글도 잘 썼다. 하버드 입학 후에도 수영·테니스·토론을 즐기고, 교내 잡지사 세 곳에서 작가로 일했다. 학과 공부 하며 과외활동에 스포츠까지 하려면 잠 한번 맘껏 못 자고 뛰어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험 스트레스에 짓눌려 기말고사 보기 싫다고 거짓말로 폭탄이 설치됐다는 신고를 했다. 학생들은 시험 보다 대피했고 경찰은 몇 시간 동안 학교 안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선 연세대 로스쿨 학생이 시험지를 빼내기 위해 교수 연구실 컴퓨터를 해킹하다 적발됐다. 그 역시 로스쿨 합격에 필요한 탄탄한 스펙을 갖췄을 것이다. 하지만 법을 지키고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조차 모르는 것처럼 교수 연구실로 숨어들었다. 혼자 시험 잘 보기 위해서.

    요즘엔 어느 조직엘 가도 그 조직 내 최고의 스펙 보유자는 인턴사원이라고 한다. 인턴들은 20여년 전에 입사한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경력과 경험으로 무장하고 조직에 뛰어든다. 하지만 요즘 스펙의 허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멋진 스펙을 가진 학생들이 힘든 일을 견디고 버티는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한숨 쉰다. 교수들은 요즘 학생들이 별다른 경험 없이 대학에 진학했던 예전 학생들보다 더 우수한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그의 책 '가장 똑똑한 사람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1960년대 초반 미 행정부를 이끈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미국 정부 역사상 최악의 실패인 베트남전 패배로 이어진 외교정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아시아 전문가도 부족했고, 베트남인들이 끈질기게 저항하게 만든 민족 감정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핼버스탬은 당시 미 행정부의 실패는 당연히 짚어야 할 문제점을 무시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거부한 것이 한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치열한 스펙 쌓기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 핼버스탬이 분석한 헛똑똑이의 한계가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