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자기가 판결했던 사건 변호를 맡은 前 대법관

조선일보
입력 2013.12.24 03:05

서울지방변호사회는 23일 조사위원회를 열고 대법관 출신 고현철 변호사가 대법관 시절에 자신이 판결한 사건과 내용이 같은 사건을 수임한 과정을 조사했다. 변호사법 31조는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공직에 있을 때 취급한 사건을 맡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서울변호사회는 고 전 대법관의 수임이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되면 대한변협에 징계를 청구할 예정이다.

고 변호사는 대법관 재임 시절인 2004년 사내 비리를 감찰팀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LG전자에서 해고된 정모씨가 정부를 상대로 부당 해고를 구제해달라고 제기한 행정소송의 상고심을 맡았다. 당시 대법원은 이 사건에 상고 이유가 포함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정씨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고 전 대법관은 2009년 대법관을 퇴임하고 대형 로펌 태평양에 취직했다. 정씨는 2010년엔 회사를 상대로 해고 무효 확인 민사소송을 냈다. 정씨는 고 변호사가 회사 측 변호인이 된 것을 알고 그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10월 고 변호사를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정씨가 낸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은 별개 사건이고, 고 변호사가 대법원 행정소송에서 주심(主審)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판·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과거 자신이 재임 중 재판하거나 수사했던 사건의 변호를 맡을 수 있게 하면 판·검사들이 퇴직 후 사건 수임을 노리고 재판·수사에서 어느 한쪽을 배려해 줄 우려가 있다. 대기업이 관련된 사건에선 기업 측에 유리하게 판결하거나 수사할 위험이 훨씬 커진다. 판·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재직 때의 사건 수임을 금지한 이유는 수사·재판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정씨가 낸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은 피고만 다를 뿐 정씨가 억울함을 구제(救濟)받고 싶어 하는 내용이 해고 무효로 똑같다. 더구나 고 전 대법관은 대법원 행정소송의 주심이 아니었지만 다른 3명의 대법관과 함께 판결에 직접 관여해 판결문에 서명한 사람이다. 설혹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이 별개 사건이어서 법 위반인지 아닌지 다툴 여지가 있다고 해도 고 전 대법관은 사건 수임을 스스로 기피하는 양식(良識)을 보였어야 한다.

대법관은 사법부를 상징하는 최고위직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퇴임하고 나서도 후배 법관들의 모범이 돼야 할 자리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국민이 사법부를 보는 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며 처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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