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죠? 조경 예술가 같지 않아요?"(김정권 행락 대표)
지난 20일 서울 명동의 '네이처리퍼블릭' 매장의 벽면은 금세 녹색으로 채워졌다. 멋스럽게 베레모를 눌러쓴 이재원(66)씨와 김민정(74)씨가 '벽면 녹화'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들은 모두 벽면 녹화 전문 업체인 '행락'의 직원들. 김정권(46) 대표는 "잠깐 용돈 벌러 나오신 게 아니라 우리 회사의 보물 같은 분들"이라고 했다.
최근 인테리어 업계에는 '벽면 녹화'가 유행하고 있다. 상점 벽을 페인트나 벽지로 마감하지 않고 살아있는 식물로 장식하는 것이다. 벽에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구조물을 설치한 뒤 여기에 각종 화초를 심어 벽 전체를 뒤덮는다. 마치 숲에서 산림욕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일을 하는 업체인 행락의 주축 세력은 신중년 6075이다. 전체 직원 28명 중 20명이 신중년이다. 행락은 국책 연구 기관인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인증을 받은 '고령자 친화 기업'이다. 고령자 친화 기업은 직원의 70% 이상을 고령자로 채운 곳으로, 인증을 받으면 정부로부터 경영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쓰임새 아직 있는 것 같아 보람"
김민정씨는 식품 회사 사장 출신이다. 약국과 예식장을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식품 회사를 차려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뒤, 2008년에 정리하고 은퇴했다. "돈도 꽤 모았고 자식도 잘 키웠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런 그에게 요즘 가장 고마운 존재가 한 달 아파트 관리비 정도 월급을 주는 이 회사 '행락'이다. 월급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니다. 김씨는 은퇴 후 미용 면허, 바리스타 자격증 등을 '취미 삼아' 땄다. 남는 시간을 보내기엔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허전했다. 배운 것이 그대로 묻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올해 초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식물 공예 기술을 배운 뒤 지난 6월 행락에 입사했다. 김씨는 "행락에 들어오고 나서야 배운 것을 써먹고 있다"며 "뭔가 아직 쓰임새가 남아 있는 기분이 들어 정말 뿌듯하다"고 했다.
이재원씨는 젊어서 전기 절연체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은퇴 후 이런저런 일을 알아보다 얼마전 정착한 게 이 회사이다. 그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참으로 소중한 직장"이라고 했다.
◇"회사 잘되는 게 가장 큰 소원"
이들은 일 자체를 즐긴다. 김씨는 "일이 정말 재밌고, 몰랐던 다른 세상을 봤다"며 "내 손을 거쳐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것 같아 무척 흐뭇하다"고 했다. 김씨와 함께 일하는 이모(66)씨는 "나는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진 않지만 노령연금 같은 것 필요 없고 이런 일자리가 훨씬 좋다"고 거들었다.
이런 기회를 준 회사에 대한 신중년의 애정은 남다르다. 김씨는 "회사가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계속 커나가는 것을 보고 싶다"며 "회사 잘되라고 기도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행락 같은 고령자 친화 기업은 이제 막 시작 단계이다. 2011년 처음 지정돼 지금까지 44개가 설립됐다. 이 중 눈에 띄는 실적을 내는 곳은 아직 많지 않다. 신중년이 하는 일도 단순 반복 작업인 경우가 많다. 대전의 한 제과 업체는 고용한 신중년들에게 생산된 빵을 비닐 포장하는 작업만 맡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역으로 긍정적이란 분석도 있다. 젊은이가 주로 기피하는 일을 신중년이 맡아 줌으로써 일자리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락의 또 다른 신중년 직원 김모(67)씨는 "일을 하게 되니 자식과 더 자주 연락하게 되고 가족 관계도 더 좋아지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