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망치기'로 메디치상을 받은 벨기에 작가 장 필립 투생(Toussaint·56)이 한국에 왔다. 문학이 아니라 미술 때문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지난해 그를 초청해 'Livre/Louvre(책/루브르)'라는 전시를 열었다. 지난 22일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난 투생은 "글이 아닌 사진과 영상, 설치미술을 통해 책에 대해 생각하게 한 기획"이라며 "책에 대한 오마주(hommage·존경)"라고 했다.
"전시작 중에 '독서를 사랑하라'는 내가 아내·아들·딸과 함께 7년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책 읽는 사진을 그러모았다. 책이 주는 기쁨과 아름다움, 읽을 때의 감정을 웃음과 눈물로 담았다. 아이들은 자라니까 시간의 흐름도 얹을 수 있었다."
투생은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Livre/Louvre'에서 그는 15세기에 단테가 쓴 '신곡' 원고 일부분을 삼성 태블릿 PC 8대에 담았다. 지옥을 그린 이 소설이 점점 불타 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 한 사이클이 끝나면 다시 멀쩡한 원고가 나타난다. 투생은 "문학은 타버리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며 "르네상스(재생)이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비해 소설은 재채기 소리를 들려줄 수도, 머리카락 색을 보여줄 수도 없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부족할 게 없다"고도 했다.
"책이나 소설은 내 삶의 뼈대, 척추다. 책이나 소설이 없다면 나는 무너진다. 어떻게 보면 신성하다. 책 한 권 쓰는 데 3~4년 걸릴 만큼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한 기쁨과 의미를 주는 작업이다."
서울도 그렇지만 파리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사람들은 책이 아닌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책이나 소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투생은 낙관하면서도 "문학에도 변화는 필요하다"고 했다. "영화도 1970년대와 비교하면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든다. 문학을 비롯해 모든 예술은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과거에 종이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순서가 중요했지만 오늘날 책은 '분절'이 특징이다. A부터 Z까지 차례대로 볼 필요가 없다. 여기 봤다 저기 봤다 하는 시선과 같다."
간결한 절제미가 돋보이는 투생의 소설은 '욕조' '텔레비전' '사랑하기' '도망치기' 등 4편이 국내에 번역됐다. 'Livre/Louvre'에서는 데뷔작 '욕조'를 읽고 있는 그의 머릿속도 단층촬영으로 전시됐다. 투생은 "내 뇌 속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들이 박물관, 영화, 책과 어울리고 관계 맺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면서 "한국 독자의 반응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26일 오후 6시 30분에 프랑스문화원에서, 27일엔 숭실대에서 독자와의 만남 행사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