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정치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

2000년도 달력의 마지막 장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한나라당 실무 당직자가 "빨리 새해가 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별났다. 2001년이 되면 "대선이 내년 치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였다. '2000년 12월'이나 '2001년 1월'이나 2002년 12월 대선까지 남은 기간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대선이 다다음 해가 아닌 다음 해라는 사실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는 얘기였다. 제대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 쳐놓고 국방부 시계만 쳐다본다는 말년 병장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야당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길래 저런 생각까지 들까 싶었다.

한나라당 사람들에겐 1997년 대선 패배가 '첫 경험'이었다. IMF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정권을 넘겨줬을 뿐 다음 대선에서 정권을 되찾아오는 것은 정해진 이치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목을 빼고 기다렸던 2002년 대선에서 또다시 졌다. 한나라당과 열성 지지자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격식을 파괴하고 상식을 넘나드는 언행을 했다. 임기 시작 3개월 만에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보수 진영의 사고방식으론 한마디로 '깜이 안 되는'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의 그런 모습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날짜를 헤아려 보는 습관이 생겼다. 2002년 대선부터 지나온 기간과 2007년 대선까지 남은 기간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이제 겨우 6개월 흘렀다. 남은 54개월을 어떻게 참고 견디느냐"는 식이었다. 이런 정서가 눈덩이처럼 굴러가면서 노 대통령 취임 1년 만에 국회 탄핵 의결이라는 파국(破局)을 맞게 된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상대의 뇌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대선 패배의 쓴맛을 느끼는 감각만은 똑같은 모양이다. 2002년 대선 전후 한나라당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행동양식이 요즘 민주당 사람들에게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다. 민주당 사람들은 작년 대선을 앞두고 '5년 만의 정권 탈환'을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다. 민주당 사람들 보기에 이명박 정부는 '역대 최악'이었다. 국민들이 그런 정권의 재창출을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유신 독재의 망령(亡靈)'이 딸을 통해 되살아나는 일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리는 역사의 퇴행(退行)이었다. '80년대 운동권 논리'에 비쳐 본 세상 이치는 그랬다. 그런데 민주당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 2012년 12월 19일 밤 현실로 나타났다.

대선 결과를 보고 '멘털이 붕괴'된 야권 지지자들은 친야(親野) 온라인 매체에 모여 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졌다. 선거 다음 날인 12월 20일 한 네티즌은 이런 글로 동지(同志)들을 위로했다. "벌써 하루가 지나지 않았느냐. 다음 대선까지 4년하고 364일만 참고 기다리면 된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했다. 그들은 이 사건의 심각성을 4·19 혁명을 촉발한 3·15 부정선거에 빗댄다. 국정원 댓글 때문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문재인에서 박근혜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국정원 규탄 촛불 집회 참석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바뀐애'라고 불렀다. 만약 야당 의석수가 10년 전 반노(反盧) 진영처럼 재적의원 3분의 2를 넘었다면 지금쯤 반박(反朴) 탄핵에 시동이 걸렸을 것이다.

우리 정치의 비타협적인 대결 구도는 오랜 권력 독점의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1997년 첫 정권 교체를 고비로 좌우(左右) 진영 간 증오의 수위가 점차 누그러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순진한 착각이었을까. 이후 진보와 보수가 10년씩 정권을 주고받고 있지만 상대 정파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불복 심리는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대선에서 패배한 쪽은 머릿속에서 다음 대선 날짜만 꼽고 있다. 모래시계를 엎어 놓고 5년 세월이 흘러내리기를 기다리며 극기훈련을 하듯 버틴다.

2012년 대선으로부터 11개월이 지났다. 2017년 대선까지는 4년 1개월이 남았다. 국민은 "벌써 11개월이 지났다"고 아쉬워하는 쪽과 "아직도 49개월이나 남았다"고 탄식하는 쪽으로 갈려 있다. 이런 내전(內戰) 상태 속에서 정권이 오고 가본들 나라는 5년마다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왼팔이라고 불렸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최근 책을 펴냈다. 신문 광고에 실린 한 구절이 눈에 꽂혔다. "분노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은 극단적인 대결 속에 뒷걸음질친다. 분노를 내려놓아야 대한민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