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에 글 올리고 게임에서 아이템 모으던 '잉여' 태식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사건건 시비가 붙던 이와 현실세계에서 싸움을 벌이기로 한다. 싸움에 대비해 종합격투기를 배우다 알게 된 또 다른 '잉여' 영자는 학교생활엔 관심도 없고 '먹방'(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을 통해 욕구 불만을 해소한다. 14일 개봉하는 영화 '잉투기'의 내용이다. 이 영화를 만든 엄태화 감독은 실제 있었던 '잉여'들의 싸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골방에 있던 '잉여'가 세상으로 속속 나오고 있다. '잉투기'에 이어 28일에는 자칭 '잉여' 네 명의 여행을 담은 다큐멘터리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개봉된다. '잉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다룬 논문선(選) '속물과 잉여'(지식공작소)와 사회과학서 '잉여사회'(웅진지식하우스)가 올가을 출간됐고, 지난해에는 잡지 '월간 잉여'도 창간됐다.
◇반(反)체제 아닌 비(非)체제
'잉여(剩餘)'의 사전적 의미는 '쓰고 난 나머지'다. 하지만 이 단어는 시대에 따라 의미를 조금씩 달리한다. 1958년 손창섭의 소설 '잉여인간' 속 '잉여'는 6·25 이후 부조리한 사회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삶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상실한 인물이었다. 최근의 잉여는 '더이상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유용하지 않은'('잉여사회' 저자 최태섭) 인간 군상이다. '잉여'는 20~30대 청년 중 직장이 없고, 학업이나 가사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이를 가리킨다. 어찌 보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쓰고 난 나머지'가 아닌 '쓰이지도 못하고 남은 나머지'인 셈이다. '잉여'라는 용어는 3~4년 전부터 디시인사이드 같은 온라인 게시판에서 스스로의 처지를 자조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쓰기 시작했고, 10~30대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잉여' 관련 신조어도 나왔다. 이들이 하는 쓸데없는 짓은 '잉여질'이고, 그 한가로운 모양새는 '잉여롭다'고 한다.
지난달 24일 통계청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쉬는 인구'(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 가운데 취업, 구직활동, 가사 등 특별한 일 없이 쉬는 사람) 중 20대의 증가율이 지난해 동기 대비 15.5%다. 잉여는 체제에 저항하는 반(反)체제가 아니라 체제에 들어가려다 실패한 비(非)체제에 가깝다.
◇'잉여질' '병맛'… 신조어도
잉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는 아니다. 온라인 게임, 댓글 달기, 게시물 올리기처럼 경제활동과는 상관없는 것에 몰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잉여 코드'는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특정 감정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잉여 코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병맛'. '병신 같은 맛'의 준말로, '맥락 없고 어이없음'을 의미한다. '나머지'들의 문화코드였던 '병맛'은 주류 대중문화의 코드로 차용되기 시작했다. 조석의 '마음의 소리'와 이말년의 '이말년 시리즈' 같은 '병맛' 웹툰에 이어 'SNL 코리아'의 패러디나 최근 개봉한 '롤러코스터' 등 영화의 유머는 모두 다소 황당무계한 것들이지만 대중의 웃음을 유발한다.
잉여를 골방에 갇힌 '키보드 워리어'나 사회의 패배자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20대 최서윤씨가 지난해 창간한 '월간 잉여'는 14호까지 발행하면서 서울의 낙서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는 사람의 이야기 '낙서의 부탁', 지방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모색하는 '지방 잉여의 생활' 등 잉여의 사색과 통찰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에서 '병맛'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김수환 한국외대 러시아어과 교수는 "'병맛'의 과격한 냉소, 막장에는 청년 세대의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여기에 담긴 건 반항도, 포기 선언도 아니기에 이들에게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