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호소에 배심원 無罪 의견 낸 62건(의견 갈린 66건 중 94%), 판사는 "有罪"

조선일보
  • 류정 기자
    입력 2013.10.31 03:00

    [국민참여재판 이래선 안 된다] [中] 감성에 흔들리는 배심원

    배심원, 법리보다 주관에 의존… 화려한 영상 등으로 변호하면 설득당하는 경우 많아
    잘못된 평결로 재판 흘러가도… 일부 재판부는 그대로 인정
    힘겹게 증언석 올랐던 피해자, '거짓말쟁이·무고' 누명쓰기도

    "강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같이 넘어졌을 뿐입니다."

    클럽에서 만난 여성(25)을 모텔 주차장에서 성폭행하려다 머리를 다치게 한 혐의(강간치상)로 기소된 A(27)씨는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상해 전과가 있고 검찰 조사에선 공격성을 보였던 그는 법정에선 말없이 잔뜩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A씨 변호인은 "여성이 먼저 김씨에게 접근했고 스킨십도 있었다"며 "날이 밝은 개방된 장소에서 그랬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8년 2월 12일 대구지법 제11호 법정에서 열린 국내 첫 국민참여재판 모습. 국민참여재판은 실시된 지 5년 8개월이 지나면서 피고인들의 연기(演技)에 배심원들이 속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 제도적 보완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2008년 2월 12일 대구지법 제11호 법정에서 열린 국내 첫 국민참여재판 모습. 국민참여재판은 실시된 지 5년 8개월이 지나면서 피고인들의 연기(演技)에 배심원들이 속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 제도적 보완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재우 기자
    피해 여성은 피해 당시 상황을 똑 부러지게 설명했으나, 배심원들은 피해자 진술은 믿기 어렵다며 A씨 측 주장을 받아들여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했다. 당시 배심원 중 일부가 "여자가 불쌍한 남자 인생을 망치려 한다"며 평의를 주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는 "A씨가 모텔행을 거절하는 피해자를 인적이 드문 주차장으로 끌고 가 넘어뜨려 머리에 상해를 입혔고, 이후 행인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는 피해자 진술과 목격자 진술이 일관된다"며 배심원 평결과 반대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2심도 유죄를 인정했고 대법원에서는 유죄가 확정됐다.

    감성 호소에 넘어가는 배심원들

    국민참여재판에선 배심원들이 피고인의 '연기(演技)'나 감성적 호소에 속아 잘못된 평결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피고인이 유무죄를 강하게 다툴 경우, 유죄보다는 무죄 평결을 내리는 비율이 높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8년~2012년 전국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 총 848건 중 배심원 평결과 재판부 판결이 엇갈린 사건은 66건이다. 그런데 66건 중 무려 62건(94%)에서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검 관계자는 "배심원들은 법리나 판례보다는 감성적·주관적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며 "어려운 법률만 따지는 검사보다 화려한 영상 같은 걸 동원하는 변호사들에게 설득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때문인지 1·2심에서 유무죄가 달라진 사건 10건 중 8건은 1심 재판부가 배심원 의견에 따라 무죄판결했지만 2심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한 사건이었다.

    법원, 잘못된 배심원 평결도 인정

    배심원 평결에 오류가 있을 때 재판장이 바로잡아주면 다행이지만, 일부 재판부가 잘못된 배심원 평결조차 그대로 따른다는 게 큰 문제로 지적된다. 사법연수원 교수 출신 법조인은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될 당시 배심원 평결이 기속력(羈束力)이 없어 완전한 배심제가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다"며 "이런 비판을 최대한 피하면서 새 제도를 빨리 정착시키기 위해 법관들이 배심원 평결을 최대한 따르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5년간 848건 중 92%(782건)는 평결과 판결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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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2012년 국민참여재판 848건 분석표
    2011년 동성 강간 사건을 담당했던 인천지법 한 재판부는 "배심원들이 피해자의 정신 상태를 고려해 피해자 의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면서도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 제고라는 국민참여재판 제도의 입법 취지에 비춰 배심원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1심에서 잘못된 판결은 2심에서 바로잡으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국민참여재판은 2심 재판부도 배심원 판단을 존중하는 추세다. 참여재판이 2심에서 파기되는 비율은 23.6%로 전국 고법 평균 파기율 40.4%의 절반에 가까웠다.

    이렇게 유죄가 될 사건이 무죄로 선고되면 그 피해는 국민과 범죄 피해자에게 돌아간다. 범죄 당시 상황을 어렵게 증언한 피해자들이 '거짓말쟁이'나 '무고 사범'으로 몰리면서 2차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지난 5년간 국민참여재판 결과에 대해 검사가 항소한 비율은 45.5%다. 참여재판 대상 주요 강력 사건의 평균 검사 항소율(21.2%)보다 배 이상 높다.

    변호사는 "참여재판, 양형 높다"

    검사들은 명백히 유죄인 피고인이 무죄가 나와 불만이지만, 변호사들은 양형이 높다고 불만이다.

    배심원들은 유무죄를 다투면 무죄 쪽으로 기우는 반면, 일단 유죄로 판단하면 가혹한 형량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참여재판을 하면 통상 예상되는 형보다 더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어 대다수 변호사가 참여재판을 기피할 정도라고 한다.

    실제 2008년 이후 5년간 2심에서 양형이 뒤바뀐 사건은 82건인데, 이 중 74건(90%)은 1심 참여재판 형이 너무 무겁다며 2심 재판부가 형을 깎아준 사건이다. 나승철 서울변호사회장은 "국민참여재판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경쟁하다 보면 재판을 마치 게임처럼 여기는 '스포츠화'를 초래할 수 있다"며 "재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면 배심원들의 판단 오류에 재판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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