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에 휘둘리는 국민참여재판

입력 2013.10.30 03:54 | 수정 2013.10.30 05:41

[국민참여 재판 이래선 안 된다] [上]
정치인 텃밭서 참여재판… 法理보다 '내 편'이 우선
지역에 따라 정치성향 뚜렷,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 공정한 배심 평결 힘들어

박근혜 후보 명예훼손 사건들
전주지법 배심원들은 전원 "무죄", 부산지법 배심원들은 전원 "유죄"

'나꼼수' 재판땐 방청객들 검사에 야유, 배심원에 '압력'
"참여재판 범위 재조정 등 국회가 법률 개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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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前官)예우, 무전유죄(無錢有罪)·유전무죄(有錢無罪)와 같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을 덜고, 공정한 재판을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이 흔들리고 있다. 2008년부터 단계적 시행에 들어간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의 재판 참여라는 긍정적 취지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이 헌법·법률이 아닌 정치적 성향(性向)이나 감성(感性)적 호소에 휘둘리면서 오히려 공정한 재판을 방해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법조계에선 도입 5년을 넘긴 국민참여재판의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재판 대상 범위를 다시 설정하고, 운영 과정에 나타난 문제점을 시급히 고쳐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28일 전주지법에서는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안도현(52·우석대 교수)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그는 대선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을 도둑질했다"는 취지의 허위 사실을 수차례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재판에는 문재인 의원이 1시간 동안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문 의원은 법정에 들어오기 전에 "비판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에 대해 선거법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옹졸한 처사"라며 검찰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검찰 고위 간부는 "문 의원이 법정 바깥에서 무죄 취지의 발언을 하고 법정에서 재판까지 지켜본 것은 사실상 배심원들에게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거나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재판은 이날 밤 11시 40분쯤 배심원 7명 전원이 "공익을 위한 글"이라는 이유로 안씨에게 무죄 의견을 내면서 마무리됐다. 배심원들은 문 후보에게 86.25%(선관위 전북도 기준)라는 압도적 지지율을 보인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출됐다. 재판장(은택 부장판사)은 "배심원 평결과 일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례적으로 다음 달 7일로 선고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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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재판 관련 기록과 통계 그래픽
비슷한 사례는 지난 8월 말 부산지법에서도 있었다. 전모(52)씨는 지난해 8월 자신의 가게에서 박근혜 후보를 비방하는 허위 사실을 23차례에 걸쳐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전씨도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7명의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고, 재판부는 전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지난 대선 때 부산 지역 유권자들의 박근혜 후보 지지율은 60%에 육박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특정 지역 배심원이 같거나 반대의 정치적 성향을 가진 피고인을 재판하면서 공정한 판단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24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에서는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지지자 150여명이 방청석을 거의 가득 채운 가운데 나꼼수 진행자인 김어준(45)씨와 시사인 기자 주진우(40)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자정을 넘긴 시간 배심원 9명 중 ‘박 대통령의 5촌 조카 살인사건 보도’에 대해 6명은 무죄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는 8명이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배심원 판단을 존중해 두 사람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판에서 방청객들은 검사가 징역형을 구형할 때 코웃음을 치거나 야유를 보냈고 일부 방청객들은 무죄가 선고되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배심원들에게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한 셈이다.

반면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지 않았다. 지난 22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2차 준비공판기일에서 변호인단은 “검찰이 입증도 못 하는 범죄 사실을 공소장에 넣어 재판부는 물론 배심원들에게도 예단을 갖도록 했다”며 거부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국민참여재판 선택 여부는 피고인에 달렸지만 진실 규명보다는 정치적으로 유·불리에 따라 이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처럼 지역에 따라 정치 성향이 뚜렷하고, 지연·학연·혈연에 얽매인 사회에서 선거법 위반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서 국민참여재판이 공정성을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낸다. 고영주 변호사는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인 우리나라에서 공정한 배심 평결을 기대하긴 쉽지 않다”며 “사법 정의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인데 국민참여재판은 다수결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꼴”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배심원들의 만장일치로 유·무죄를 가리며 의견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을 경우 배심원단을 재구성한다.

서울고법의 부장판사는 “배심제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전문적인 법률 지식이 필요한 명예훼손 사건이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선거 사범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반인에게 이미 알려진 사건은 배심원들이 편견을 가질 수 있고, 재판이 자칫 여론 재판으로 흐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민참여재판은 보여주기 위한 ‘포퓰리즘’에서 나온 것”이라며 “아직까지는 실험 단계인 만큼 시행착오를 통해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형사소송법상에 명백한 원칙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선거법 위반 같은 정치적 사건이라도 재판부가 국민참여재판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며 “일반 사건과 달리 배심원 구성 방식을 다르게 하는 방식으로 국회가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8년 233건이던 국민참여재판 신청 건수는 2010년 437건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737건으로 매년 급증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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