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장사? 그래, 맞다

    입력 : 2013.10.29 03:00 | 수정 : 2013.10.29 09:46

    [여든둘의 디자인 巨匠 알레산드로 멘디니]

    "기업들, 내 이름 마케팅 이용… 하지만 이름 거저 얻진 않아
    한국 제품, 기술 강박 버리면 더 좋은 디자인 탄생할 것"

    여든둘의 디자이너는 겸손하고 솔직했다. 과오(過誤)를 담담하게 인정했고, 새 시대의 디자인 앞에 겸허했다. 현대 디자인을 대표하는 디자인 거장 중 최고령인 알레산드로 멘디니(Mendini)가 방한했다.

    국내에선 디자인 문외한이라도 알 만한 여인 모양의 와인 따개 ‘안나 G’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명성 앞에 ‘와인 따개 디자이너’란 수식은 옹색하다. 1970년대부터 세계적인 건축잡지 ‘까사벨라’ ‘도무스’ 편집장을 역임하며 디자인 담론을 이끌어왔다. 1980년대에는 디자인그룹 ‘멤피스’의 일원으로 진보적인 디자인 운동을 주도했다. 과한 장식과 알록달록한 원색을 조합한 색상 패턴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이끌기도 했다.

    한국 기업과 콜라보레이션(협업)을 가장 많이 한 디자이너 중 하나다. 삼성전자·LG전자·롯데카드·한샘·한국도자기 등과 일했다. 국민대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 주최로 30일 열리는 강연회 ‘디자인 인사이트-다문화시대의 여성과 디자인’ 참석차 온 그를 28일 만났다.

    사실 멘디니는 그간 국내 언론과 수차례 인터뷰했다. 일견 식상해보이기까지하는 인터뷰이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특정 브랜드 마케팅과 무관한 인터뷰였기에 멘디니는 그간의 인터뷰에서 볼 수 없었던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했다. 편집장 출신답게 “자유로운 비판을 즐긴다”며 심기 불편할 법한 질문에도 ‘뻔하지 않은’ 진솔한 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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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세기 가까이 현대 디자인의 중심을 지킨 팔순의 거장은 단구(短軀)지만 꼿꼿했다. 멘디니가 쓴 안경은 한국에서 맞춘 것이다. 안경테는 이탈리아제, 렌즈는 한국산. 그는 “역시 정교한 기술은 한국이 최고”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한국 기업이 당신의 ‘이름값’으로 업체들이 장사한다는 비판도 있다.

    “잘 봤다. 기업들은 건축가나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마케팅을 한다. 하지만 ‘이름값’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 사이 무수한 작품으로 명성을 쌓아온 것이다. 다만 능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가 스타 디자이너에 막혀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몇 해 전 아무 무늬 없는 김치냉장고를 사러 간 적이 있다. 매장 직원이 나더러 “촌스럽다”며 ‘멘디니 냉장고’를 추천했다. 그 ‘신상’ 냉장고는 20만원이 더 비쌌다. 모양·기능은 같은데 표피만 다르다고 값을 비싸게 받더라. 마케팅 술수 아닌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참 웃던 그가 말했다.) 기능·형태는 같고 껍데기만 다르다고 디자인을 안 한 건 아니다. 데코레이션도 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이다. 에르메스 넥타이가 흰색과 검정만으로 디자인됐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게 에르메스일까.” (멘디니는 에르메스 넥타이도 디자인했다.)

    ―반세기 동안 활동하며 디자인의 진화를 체감했을 거다.

    “디자인 문화를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는 컴퓨터의 출현이다. 그전에는 연필로 스케치했다. 모든 게 수작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사무실만 봐도 직원 15명 중 나만 연필로 작업한다. 커피잔을 디자인한다 치자. 예전엔 한 가지 디자인하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30분 만에 50가지를 그린다. ‘창의’를 생산하는 방법이 바뀌었다.” (그는 거의 컴맹이지만 ‘예뻐서’ 맥북에어, 아이패드를 샀단다. 이메일은 볼 줄만 알고 보내지는 못한다.)

    ―기술 지배적인 사회 풍조에 비판적인가.

    “그렇진 않다. 리서치 할 때 과거엔 책·잡지를 일일이 뒤져보고 했다. 요즘은 인터넷만 열면 자료가 무궁하다. 신소재 정보가 많다. 정보가 없어 아예 접근하지 못했던 소재를 시도할 수 있다. 가능성이 많아진 거다. 역설적으로 기술이 다시 ‘손의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디자이너스 메이커스(Designers Makers)’라는 디자인 집단이 있다. 생산라인 없이 수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작품을 인터넷에 올린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주문하면 제작한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손’과 ‘기계’ 모두 중요하단 말인가.

    “약을 먹을 때 한방과 양방을 적절히 섞어야 효과적이다. 손과 기계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하는 디자인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건 없다. 다만 디자인이란 이름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냈다는 반성은 있다. 나 역시 해서는 안 될 것들을 했고. 너무 권력적이거나 권위적인 것들.”

    ―예를 들어 어떤 것인가. 에르메스? 까르띠에? (멘디니는 까르띠에 설치물, 에르메스 기업홍보관을 만들기도 했다.)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며) 그렇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즉답은 하지 않겠다. 다른 방식으로 답하겠다. 디자이너가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모르고 디자인하면 그때부터 재앙이 시작된다. 나 역시 사용자와는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디자인한 적이 있다.”(자기비판은 이제 그만 하자며 멘디니가 웃었다.)

    ―그 오랜 시절 현역으로 활동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은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에선 내 나이에 일하는 게 자연스럽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갔지만 함께 활동했던 에토레 소트사스(1917~2007, 멘디니와 함께 이탈리아 디자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거장)도 고령까지 일했다. 내 친구 디터 람스(81·애플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가 아이폰 만들 때 영감 받았던 독일 디자인 거장)도 여전히 활동하지 않나. 게다가 그 친구는 여전히 약주도 한다. 난 그 친구만큼은 못 마시지만. (웃음) 하고 싶고, 재미있으니 (디자인) 해왔다. 물론 일이기도 했지만.”

    ―와인 따개 ‘안나 G’는 여자 친구가 기지개하는 모습에서, 조명 ‘라문 아물레또’는 손자와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것 같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거기서 얻어지는 스토리에 집중한다. 내 디자인에서 사람은 늘 중요하다. 직원들도 중요하다. 직원이 디자인한 제품 이름에 그 직원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크리스티나 함멜이라는 직원이 카펫을 디자인했는데, 그 카펫 이름은 크리스티나다. 와인 따개처럼 사람 얼굴 형상을 담은 디자인을 즐긴다. 얼굴 형태의 제품을 마주하면 마치 사물과 내가 대화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동상 같기도 하고 종교적인 느낌도 든다. 와인 따개를 봐라. 한 여인이 나를 위해 와인을 오픈해준다. 그것도 발레리나의 자태로. 얼마나 감동적인가.(웃음)”

    ―기사를 보니 ‘안나 G’가 여자 친구를 형상화했다는 얘기만 있고, 요즘 얘기는 없더라. 그녀는 지금 뭘 하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걸 즐기진 않는다. 그녀는 내 여자친구였고(아내는 따로 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였다. 그 이상은 노 코멘트. 그런데 ‘안나 G’라는 이름은 내가 지은 게 아니다. 와인 따개를 생산한 알레씨 사장이 붙인 이름이다.”

    ―이번 방한에서 ‘여성과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데.

    “일반적으로 남성 디자이너는 구조적인 미를 추구하고 여성 디자이너는 시적이고 감성적인 미를 추구한다. 내 디자인은 어쩌면 여성에 가까울지 모른다. 엄마의 자궁 안처럼 아늑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그동안 여성적인 디자인이 상대적으로 덜 인정받았지만 요즘은 사회적으로 여성적인 디자인이 더 주목받고 있다. 여성 디자이너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한국에 자주 온다. 그 사이 변화를 감지하나.

    “1993년 대전엑스포 참여를 시작으로 수십 차례 왔다. 20년 전엔 전통적인 수작업이 많았다. 그때 만해도 삼성 같은 기업이 지금처럼 세계적인 기업이 아니었다. 요즘 한국은 테크놀로지를 앞세워 문화적으로 성장한 느낌이다. 장인들을 재발견하는 노력도 보이고. 하지만 가구 디자인 쪽은 수준이 높지 않다. 이 분야는 한국이 강점을 갖기 어렵다. 유럽이 휴대전화 디자인을 못하듯.”

    ―한국의 디자인에 한마디 고언(苦言)을 해준다면.

    “한국인들이 IT 기술 강박을 벗어나면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올 거다. 너무 많은 정보는 사람을 옭아맨다. 현실감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기술은 결국 인간을 뛰어넘진 못한다.”

    [손자를 아끼는 마음, 램프가 되다]

    멘디니가 디자인한 제품들

    ①2010년 디자인한 조명 ‘라문 아물레또’. 손자 토마조와 태양, 달, 지구 이야기를 하다가 만든 램프. 손자의 수호물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디자인했다. 멘디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디자인 영감을 종종 얻는다.

    ②올해로 탄생 20주년을 맞은 멘디니의 대표작 와인따개 ‘안나 G’. 여자친구가 기지개 켜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안나, 지금은 뭘하고 있을까. 멘디니가 답했다. “그녀는 내 여자친구였고, 이탈리아 디자이너였다. 더 이상은 노코멘트.”

    ③‘프루스트’ 의자.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 의자에 패턴을 입혔다. 기존 의자에 장식만을 바꿔 더 이상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기 불가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 작품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새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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