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의 탄생지 암스테르담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400여년 전 그림이 많이 걸려 있다. 첫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향신료 무역을 위해 바다에 띄운 배가 항해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적지 않다. 어떤 그림에는 무역선의 이력도 적혀 있다. '1598년 5월 1일 출항, 1599년 7월 19일 귀환.' 암스테르담을 떠난 배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찍고 인도까지 왕복하는 데 1년 이상 걸리던 시절이었다.
배를 띄울 때 투자자를 모집했지만 이윤은 보장하지 않았다. 보험도 물론 없었다. 22척을 출항시켰다가 12척만 돌아올 때도 있었다. 무모한 돈벌이에 고용된 선원들 생명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다. 지금 잣대로 보면 초기 주식회사의 경영 방식은 대부분 불법이었다. 그래도 그런 모험에 돈과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 많았던 덕분에 암스테르담은 그 시대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인류 역사에서 기업 활동은 항상 법보다 앞섰다. 투자자의 권리, 보험 가입 의무, 노예 금지 같은 법적 제한은 주식회사 탄생 이후 100년, 200년을 거치면서 나중에 만들어졌다.
만약 그 시절 암스테르담 정부가 경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법을 먼저 만들어 놓고 투자자를 모집하고 선장을 뽑았다면 회사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법으로 투자자에게 꼭 지키라는 의무를 여럿 부과하고 선장이 해서는 안 되는 금기(禁忌) 사항을 열거했더라면 누구도 위험한 항해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법 집행이 지나치게 강하면 경제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치를 주식회사의 탄생 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다.
국내 경기가 풀리지 않는 요즘 주식회사의 원점(原點)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외치며 창업 자금을 두툼하게 지원하는데도 왜 벤처 붐은 일어나지 않는가. 대통령이 빨간 옷을 차려입고 나와 투자해달라며 기업인들을 다독이는데도 왜 투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대통령이 전통 시장에서 장을 보며 소비에 솔선수범하건만 왜 5만원권 현찰 더미가 은행을 빠져나가면 좀체 되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덮쳤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0% 이상 성장하던 경제는 1979년 8.4%로 추락하더니 1980년엔 마이너스 1.9%로 뒷걸음질했다. 1981·1982년에도 7.4%, 8.3%에 머물렀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높지만 당시로선 답답한 수준이었다.
1980년대 초 우리 경제가 장기간 침체했던 1차 원인은 석유가 제공했지만 유신 시대의 긴급조치, 대통령의 피살, 군부 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이 경제를 얼어붙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나라가 차가운 긴장 상태에 진입하면서 기업 활동이나 소비가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경기가 풀린 시기는 그보다 3년 후인 1986년부터였다. 아시안게임(1986년) 서울올림픽(1988년)을 치르며 잔치 분위기가 살아나고 원유 가격과 국제 금리, 환율이 하락하면서 큰 호황을 맞았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경기 회복을 위해 재정 지출을 늘렸다. 금리도 인하했다. 규제도 풀고 있다. 정책으로는 할 만큼 하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 연구소들은 내년에 잘해야 3%대 성장을 이룰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올해 2%대 성장에서 3%대 성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자랑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3% 성장으로 어느 국민이 호황 기분을 느끼겠는가.
경제학은 갈수록 심리학을 더 깊게 품어가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경제를 움직이고 때론 변덕스러운 인간의 집단 심리가 금융 위기를 키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경제를 재정 지출이나 금융 정책만으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 된 것이다.
정권이 바뀐 이후 갑갑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야당은 청와대와 여당의 강공(强攻)에 몰려 답답하다고 불만이다. 노조 세력도 법을 앞세운 정부의 공세에 밀려나고 있다. 경건하고 엄숙한 공기가 권력층 주변에 꽉 들어차 있다. 권력 핵심에 가까운 인물일수록 표정은 단단하다. 허튼 농담이라도 했다간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을 느낀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법과 원칙을 다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당연히 맡아야 할 임무다. 그러나 법과 원칙을 앞세운 연속 공세가 지나친 나머지 그것이 경제를 싸늘하게 위축시키고 있지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50년 이상 성장을 지속하면서 '이건 안 된다'는 금지 팻말을 수없이 세웠다. 규제 법안은 해마다 늘고 있다. 정치와 사회가 콘크리트 아래 갇힌 듯 긴장감이 흐르는 냉동 분위기에서는 경제 회생의 새싹도 솟아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