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전쟁 포기'를 명기한 일본의 평화헌법(1947)은 누가 만들었을까? 맥아더의 강요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애초의 발상은 A급 전범 시라토리(白鳥敏夫)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신(新)학설이 더 설득력 있다. 그가 스가모(巢鴨)구치소 수감 중 요시다(吉田茂) 외무장관에게 보낸 1945년 12월 10일자 영문 서한에서 '천황제 유지' 방안으로 전쟁 포기를 제안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틀 전인 8일 마쓰모토(松本烝治) 국무대신이 중의원(衆議院)에서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總攬)한다는 메이지헌법의 근본원칙은 변경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할 정도로 당시 일본 지배세력은 '국체(國体)' 즉 '천황주권'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국제 여론은 달랐다. 소련·호주·뉴질랜드가 종전 직후부터 줄곧 천황제 폐지를 요구할 만큼 천황제의 '존속'이 군국주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고육지계(苦肉之計)가 시라토리의 전쟁 포기 제안이다.
왜 그는 요시다가 받아 볼 서한을 일문(日文)이 아닌 영문으로 작성했을까? 미군정의 검열 과정에서 자신의 부전(不戰) 제안이 맥아더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림수는 적중했다. 1945년 12월 여론조사에서 94.8%의 일본인이 '천황제 유지'를 택한 상황에서, 이듬해 1월 호주와 뉴질랜드가 히로히토 일왕이 포함된 전범자 명단을 제출하자 맥아더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천황제를 유지해 일본인의 반발을 막고 전쟁 포기를 못 박아 국제사회의 여론을 달래려 했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가 국가 상징으로서 천황제 존속과 전쟁 포기라는 모순된 내용을 담은 헌법 개정 지침인 '맥아더 노트'(1946년 2월)였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주장을 미국이 용인한 지금, '한반도흉기론'을 내세워 러일전쟁을 '자위전쟁'으로 호도했던 일본의 손을 들어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은 세기를 건너뛰어 우리의 정수리에 비수로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