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 해군 창설자 故 손원일 제독의 부인… '해군의 어머니' 홍은혜 여사[정정내용 있음]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3.10.14 03:12 | 수정 2013.10.15 10:35

    "그때 군인들은 너무 불쌍… 말로는 다 못해요, 눈물이 마음의 말이지"

    "외국인들이 생판 모르는 한국에
    무기를 갖고 와서 싸워줬다
    여기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 참전,
    밴플리트 장군 아들은 죽었다"

    "배 한 척 없는데 대장이 되면
    온 세상의 해군들이 웃을 것
    장차 함정을 가질 때까지 안 한다"
    남편, 이 前대통령 승진 권유 사양

    홍은혜(95) 여사는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한 고(故) 손원일 제독(1909~1980)의 부인이다. 그냥 훌륭한 남편을 둔 가정의 부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삯바느질로 모은 돈으로 국내 최초의 전함 '백두산함' 구입에 일조했고, '바다로 가자' 등의 해군가를 작곡했고, 6·25 당시 부상병과 유족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손원일 제독이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처럼 홍 여사는 '해군의 어머니'로 불린다. 신임 해군참모총장은 그녀에게 따로 신고하러 오는 게 관례가 됐다.

    "그때는 내 가정을 아기자기하게 꾸리는 것보다…, 군인들을 보면 다 아들 같았으니까요. 너무 불쌍했어요. 그러니 나 개인에 대해서는 돌아볼 수가 없었어요."

    역사 속 인물로 알았는데, 해군이 마련해준 서울 대방동의 관사 아파트에서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한 드라마 작가(김광휘씨)의 연락 덕분이었다. 그녀의 학창 시절 스토리를 담은 '무궁화와 사쿠라'의 출판 기념회를 17일 해군회관에서 갖는다고 알려온 것이다.

    내가 지금껏 만난 인터뷰 대상자 중 최고령이었다. 그녀는 과거 시절의 특정 대목만 부분적으로 기억했다. 질문과 상관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한 세기(世紀)에 가까운 나이를 감안하면 그녀의 건강과 정신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많이 앞세웠다. 이 나라가 6·25 전란에서 살아남은 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려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쟁이 터지자 남편이 세운 해군사관학교 1기생들이 '우리는 왜 공부하고 있어야 하느냐.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고 했어요. 죽기를 원했지, 결코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죽는 것도 때가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렸어요. 우리는 우리의 일이라 열심히 했다지만 외국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너무 헌신적으로 해줬어요. 생판 모르는 한국에 자기들이 무기를 갖고 와서 싸워줬어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이 참전했고,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여기서 죽었어요. 이래서 우리가 살아났어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해주신 거죠. 손 제독이 해군을 창설한 것도…. "

    손원일은 중국 상하이의 중앙국립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뒤 청년 시절에는 원양항해사로서 바깥세상을 돌아봤던 인물이었다. 그는 언젠가 우리도 해양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결혼한 뒤 무역회사의 상하이 지사에서 근무했고, 사업가로서 상당한 부(富)를 이뤘다.

    그가 상하이에서 잠깐 귀국할 일이 있어 기차를 탄 다음 날이었다. 봉천(奉天·지금의 심양)역에서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상하이의 사업을 모두 버리고, 서울에 도착한 지 사흘 뒤 담벼락마다 광고문을 붙이고 다녔다. '바다에 뜻을 가진 애국 청년들이여! 모입시다!'

    그때 모인 70명으로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두 달 뒤에는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를 창설했다.

    "해군 창설은 나라에서 한 게 아니라 개인이 한 것이지요. 아무 예산이 없었어요. 먹고 입고 잠잘 데도 없었어요. 바다에는 전투함 한 척 없었고, 아니 배 없는 해군도 있나요. 생도들은 일본 군복을 고쳐 짝짝이로 입었거나 셔츠를 군데군데 기워서 입었거나 때묻은 한복 저고리 차림이었어요. 거기에 고무신이나 사이즈가 큰 미군 구두를 신었어요. '신사(紳士) 해군'이 아니라 한마디로 상거지였지요."

    그녀는 울먹거렸다.

    "불쌍했어요. 그때 일을 말로 하려면 너무 부족해요. 그러니 눈물은 마음의 말이지요. 나라는 해방이 됐는데, 일본 군가에 가사만 바꿔 불러요. 내가 가진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그녀는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 손 제독이 가사를 쓰고 제가 작곡을 한 게 '바다로 가자'였어요."

    해군과 해병대에서 복무했던 이들은 이 노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95세의 그녀는 거실의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해 보였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면서.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그 뒤 '해군사관학교 교가' 전국 공모에서도 그녀의 곡(이은상 작사)이 당선됐다. 그녀는 '해방행진곡' '대한의 아들' '해사 1기생가' '해군부인회가' 등도 작곡했다.

    홍은혜 여사는“함정을 사오기 위해 삯바느질을 했지만 백두산함이 들어왔을 때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손원일 제독, 홍은혜 여사.
    국내 최초의 전투함‘백두산함’
    "1947년 여름 해사 2기생과 3기생이 남해안 저도에서 수영 훈련을 했어요. 내게 와서 군가를 지도해달라고 했어요. 아이 셋을 데리고 우리가 먹을 일주일치 식량을 큰 바구니에 담아 갔어요. 내 짐이 숙소에 도착했는데 감자 열 알만 남아 있고 바구니가 텅 비어 있어요. '얼마나 배고팠으면 요리도 안 한 것을 먹었을까' 하며 불쌍해서 울었어요. 우리 가족은 먹을 것이 없어 일주일을 못 채우고 이틀만 머물고 돌아왔어요."

    이렇게 해군은 창설됐지만 6·25전쟁 직전까지 우리 영해를 지킬 단 한 척의 전투함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육해공'이 아니라 '해륙공'이라고 불렀고, 제일 먼저 손 제독을 대장으로 승진시키려고 했어요. 그때 손 제독이 '배가 한 척도 없는데 대장이 되면 온 세상의 해군들이 웃을 겁니다. 훗날 우리가 함정을 갖게 되면 대장 계급을 받겠습니다'라고 사양했어요."

    ―최초의 전투함을 마련할 때 여사님의 공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손 제독은 함정을 구입하기 위해 해군 자체적으로 모금을 했어요. 병사 월급 중에서도 일부를 떼냈어요. 나는 해군 부인들과 삯바느질을 하고 수제품을 만들어 팔았어요. 폐품도 모았고, 패물도 내다 팔았지요. 손 제독이 그렇게 모은 6만달러를 들고 이 대통령을 찾아갔어요. 이 대통령은 정부 돈을 더 보태 12만달러로 '백두산함'과 세 척의 배를 사준 겁니다."

    '백두산함(Ensign white head)'은 미국이 2차 대전 때 썼던 중고 함정이었다. 구입 당시에는 미 해양대학에서 실습 용도로 쓰고 있었다. 6·25 발발 두 달 전 부산으로 들어왔다.

    ―'백두산함'이 들어왔을 때 직접 타봤습니까?

    "나는 못 봤어요. 얘기만 들었지. 그때는 해군을 위해 돈을 마련하느라 나는 바빴어요."

    백두산함은 6·25 전사에서 첫 승전을 기록했다. 6·25 다음 날 동해안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북한 함정을 격침한 것이다. 그 뒤 백두산함은 우리 피란민을 수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6·25가 터졌을 때 여사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해군 측에서 전쟁 났으니 빨리 도망가라고 하면서 수원까지 데려다 줬어요. 이틀쯤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어요. 빈손으로, 돈 한 푼 없이 아이 셋을 데리고 내려온 거죠. 당장 먹을 것도 잘 데도 없었어요. 피란살이 집에는 유리창이 다 깨져 있어요. 나는 몸뻬 바지 차림이었어요. 나중에 진해로 피란온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도 그렇게 다녀왔어요. 평소에 이 대통령은 바지 입는 여성을 싫어했지만 '몸뻬 바지 부인'이라며 나는 귀여워했어요. 그때는 먹을 것이 없어 자꾸 굶다 보니 내가 더 날씬했고 예뻤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분으로 기억됩니까?

    "헐벗은 군인들을 보면 '우리 군대의 형편이 이럴 수가…'하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이승만 대통령 부인)의 일기(日記)에도 진해에서 뒷바라지를 해주던 여사님 얘기가 나오더군요.

    "나는 따로 할 일이 많았고, 프란체스카 여사님과는 말이 안 통하니 같이 다닌 적은 별로 없었어요. 참전국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을 도운 적은 있어요. 참전국 대사들 모임을 주재하는 여사님께 '우리가 만든 수예품을 팔아 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했어요. 그 자리에 가면 여사님이 홍시를 줬던 기억이 나요."

    6·25 전란 동안 그녀는 '해군부인회'를 조직해 해군 병원을 돌았다. 옷과 이불을 빨래해주고, 부상병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고, 밥을 먹여 주고, 용변 보는 것을 도왔다.

    "돌보는 것만 아니라 생활을 도울 수 없을까 생각했어요. 구호금을 모으기 위해 집집마다 방문했어요. 모두 어려울 때라 걷히질 않았어요. 그래서 해군부인회에서 군인 작업복을 만들기로 했어요. 피란민들이 너무 많아 부산과 제주도에는 공장 지을 땅이 없었어요. 낡은 선박 다섯 대를 붙여 바다에 띄워 공장을 만들고 미군의 협조로 일본에서 재봉틀 50대를 들여왔어요."

    손원일 제독은 해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 국방장관과 독일 대사를 지냈다. 1980년 별세했다. 2007년 취역한 해군의 첫 번째 잠수함(1800t급)은 '손원일함'으로 명명됐다.

    ―곁에서 지켜본 손 제독은 어떤 분이었나요?

    "손 제독은 명예나 권세, 물욕에는 초연했어요. 이분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할 때 '중요한 회의가 있어 며칠 다녀올 테니 아이들을 부탁하오'라며 떠났어요. 이분 동상에 새겨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하는 문구처럼 그대로 사셨어요."

    ―남편으로서는 어떠했나요?

    "스위트(sweet)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여덟 살 차이가 났으니 애틋한 사랑보다는 존경을 했지요."

    ―손 제독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도 여사님은 해군과 인연이 끊기지 않았군요.

    "이분이 돌아가시고 사흘 뒤 해군사관학교를 찾아갔어요. 해사 교장님께 '손 제독은 신사(紳士) 해군을 가장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생도들을 꼭 그렇게 교육시켜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렸어요." 이때부터 가장 신사다운 생도 졸업생에게 주는 '원일상'이 제정됐고, 매년 시상식에 그녀가 참석해왔다.

    숭고함은 과거에 있었구나, 그녀를 작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바로잡습니다
    ▲14일자 A33면 '최보식이 만난 사람―홍은혜 여사' 중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은 6·25에 참전했지만 여기서 전사하지 않은 것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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