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그 작품 그 도시] 당신이 외로운 건 그대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

조선일보
  • 백영옥·소설가
    입력 2013.09.28 03:03

    영화 '하나 그리고 둘' - 타이베이

    올여름, 타이베이에 가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비슷하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아니, 그 습하고 더운 곳에 왜? 여름에 타이베이 가는 건 미친 짓이야!" 가보면 안다. 타이베이의 여름은 정말이지 덥다. 바다를 접한 도시에는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부는데, 35도 이상 올라가는 8월엔 좀처럼 땀이 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땀으로 속옷까지 흠뻑 젖는다. 생각해보면 대만에서 딱히 보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베이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왕가위 영화의 흔적을 찾기 위해 홍콩에 가는 것처럼 나는 '밀레니엄 맘보'와 '하나 그리고 둘'의 도시에 가보고 싶었다. 두 번이나 영화를 봤는데도 "저 영화가 원래 이런 내용이었나?"하고 놀라게 되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바람을 피웠는지 아니었는지가 헷갈리고, 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이유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영화의 내용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식이다. 놀라운 건 볼 때마다 기억나는 장면도 제각각이라는 사실인데, 다만 '좋았다'는 잔상만은 아득하게 오래 남아 두고두고 찾아보게 되는 영화 말이다. 나는 십 몇 년에 걸쳐 '하나 그리고 둘'을 네 번 보았다.

    이안의 '결혼피로연'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 NJ의 처남 아제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대만 영화에는 유독 결혼식 장면이 많이 나온다). '아제'는 사귀던 여자가 임신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결혼식을 올리는데, 식장에 옛날 애인이 찾아오면서 예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다. 이 일로 심기가 불편해진 할머니는 결국 식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손녀 틴틴은 그런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가는데, 할머니는 틴틴이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대신 버리러 나갔다가 넘어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만다.

    타이베이 스린(士林) 야시장이 인파로 넘쳐나고 있다.
    대만을 찾은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 중 하나인 타이베이 스린(士林) 야시장이 인파로 넘쳐나고 있다. / 조선일보DB
    거의 식물인간이 된 할머니 곁에서 매일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가족은 점점 지쳐간다. 틴틴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막냇동생 양양은 할머니에게 이야기해주기를 거부한다. NJ의 아내 밍밍은 집안 살림과 회사 일에 지쳐 잠시 집을 떠나고, 동생의 결혼식장에서 30년 만에 자신이 찬 첫사랑과 마주친 NJ의 회사에는 위기가 닥친다. 그 사이 틴틴은 이웃집 친구 리리가 차버린 남자 친구 패티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리리에게 돌아가 버린 패티 때문에 괴로워하던 틴틴은 어느 날 아침 경찰의 호출을 받는다. 패티가 리리와 리리의 어머니를 동시에 만나던 영어 선생을 살해한 것이다. 경찰서에서 돌아와 잠이 든 틴틴은 꿈속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그 순간 옆방에서 할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NJ는 첫사랑과 함께 떠난 도쿄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밍밍 역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곳은 할머니의 영정 앞. 할머니에게 '얘기'하기를 끝내 거부하던 양양은 자신이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처음으로 얘기한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은 꽤나 복잡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가족들은 제각각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살고,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은 없다. 마치 암 환자가 '암'과 공존해 살아가는 것처럼, 삶의 곤란함을 극복하려 들지 않고 그저 시간에 묻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려는 태도다. 사랑, 죽음, 불륜에 치정까지 나왔으니 이보다 독한 줄거리가 있을까 싶지만 모든 장면에는 이상할 정도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존재한다. 막장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피 한 방울, 총소리 한 번, 커다란 다툼 한 번 없다. 나는 그것이 대만식 작명법 때문은 아닐까 궁리해보기도 했다. 밍밍, 틴틴, 양양, 하오하오 … 같은 이름이 반복되는 동안 그 사이에 깃든 공간이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란 엉뚱하게 문학적인 생각 말이다.

    금요일 늦은 밤, 타이베이 예술대학으로 가는 마지막 지하철에 탄 나는 그곳에 취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타이베이의 지하철에선 음식은커녕 물조차 마실 수 없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타이베이에서 본 대만 사람들은 '야망'이나 '성공'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또 어쩌다 길을 물어보면 '천지 사방 아는 곳 하나 없는 이 외국인이 이곳에서 나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되지!'란 결심이라도 한 듯 너무나 적극적으로 길 찾기를 도왔다. 야시장엔 취객보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손에 음식을 잔뜩 들고 맥주 대신 달달한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끔찍하게 덥고 습한 대만의 날씨는 힘들었지만 나는 야망보단 행복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 이 도시 특유의 순한 맥박이 좋았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는 양양의 얼굴이었다. "할머니, 할머니랑 말하기 싫었던 게 아니에요. 내가 말할 얘기들을 생각해 봤는데, 할머니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였어요. 또 할머니는 항상 사람들의 말에 늘 귀 기울여야 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할머니가 멀리 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어디 가신단 말씀 하신 적 없잖아요. 전 할머니가 어디로 갈지 제가 알아맞히길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할머니, 전 아는 게 적어요. 할머니, 제가 크면 뭘 하고 싶은지 아세요?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일을 말해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건 무척 재밌을 거예요. 보고 싶어요, 할머니. 특히 이름도 없는 새로 태어난 사촌을 볼 때면 '이젠 나도 늙었나 보다'라고 항상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사촌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나도 '나이 먹었나 봐'라고."

    영화 '하나 그리고 둘' 포스터
    양양의 비밀은 이렇게 풀린다. 인간이 외로운 건 일평생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외로운 건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린 '양양'은 아직 그걸 알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뒷모습만 찍는 아이의 내면엔 인간의 외로움을 바라보고자 하는 직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든 '에드워드 양'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한 아이의 따뜻함으로 대만 사회의 환부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특유의 균형감을 유지한 채 말이다. 이른 죽음으로 그의 영화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슬프다.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감독의 작품. 오념진, 금연령, 오가타 이세이 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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