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에 있는 주한 미국 대사 관저(官邸)에는 130년 전의 분위기가 꽤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통 기와집 모양과 대들보, 한국식 정원, 격자무늬 창살…. 이곳은 1883년 초대 주한 공사 푸트가 고종(高宗) 임금의 권유로 사들였다. 키가 컸던 푸트는 한옥에 익숙지 않았던지 "일어서면 모자가 천장에 닿아 불편하므로 대사관을 새로 짓든지 해야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자 국무부는 "조선에서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는 법이 아니다"고 회신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관에 이어 영국·프랑스·러시아 공관이 들어서면서 덕수궁 뒤편 정동은 유럽·미국 타운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나라 사람들은 길 건너 북창동 지금의 플라자호텔 주변과 명동에 모여 살며 차이나타운을 이루었다.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조약에 따라 서울에 온 청나라 대표가 명동 입구의 집 한 채를 매입해 공관으로 사용했다. 대원군 심복으로 포도대장을 지낸 이경하의 집이었다.

▶1885년 스물일곱 나이에 조선 주재 총리 교섭 통상대신으로 온 원세개(袁世凱)는 이 집을 무대로 10년 동안 조선의 정치·경제·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 관료들은 그를 '원대인' '감국대신'이라 불렀다. '감국(監國)'이란 중국이 속국에 파견하는 감독관을 말한다. 조선에 온 외교사절 중 원세개만이 앉아서 고종을 알현했다.

▶원세개는 각국 공사들이 회의하는 자리에도 언제나 통역관을 대신 보냈다. 나는 너희들과 격이 다르다는 거드름이었다. 1887년 고종은 박정양을 초대 주미 공사로 임명했다. 원세개는 청나라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니 발령을 취소하고 북경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라고 고종을 압박했다. 명동 청나라 공관은 광복 후 대만 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다시 중국 소유로 넘어갔다.

▶2010년 신축 공사에 들어갔던 명동 중국 대사관이 올 연말 안 입주를 목표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10층짜리 업무용 건물과 24층 숙소용 빌딩으로 이뤄진 새 중국 대사관은 주한 외교 공관 중 가장 크고 중국의 해외 공관 가운데 워싱턴DC 다음 둘째 크기다. 보안을 위해 중국 국영 건설업체가 직접 시공을 맡았고 철근·시멘트 같은 건자재까지 중국서 들여왔다. 작업 인부들 역시 중국 국적자로 제한했다. 서울 중심가에 치솟은 새 중국 대사관 건물에 세계의 수퍼파워로 떠오른 중국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물론 대한민국도 구한말처럼 작고 힘없는 나라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