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실기시험 없앤 홍익대 美大의 교육실험

입력 2013.09.13 18:08 | 수정 2013.09.15 09:42

그림 실력이냐 성적이냐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올해 홍익대 미대(美大)에 입학한 K양은 요즘 교수들이 내주는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다. K양은 학생부 성적 100%로 선발하는 수시 2차에 합격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지방 소도시에 있는 조그마한 화실에 다니며 나름 기초를 다졌지만 예고 나온 친구들에 비하면 아마추어 수준”이라며 “예고 출신들보다 몇 배 노력해야 실기 수업에 뒤처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007년 대입 시험 때 실기시험 결과를 채점하는 홍익대 미대 교수들. 실기시험을 폐지하면서 이와 같은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해 입학한 L군에 비하면 그래도 K양의 상황은 양호한 편이다. 수도권의 한 외국어고를 나온 L군은 고교 2학년 때 에드바르 뭉크의 평전을 읽고 감동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홍익대 미대가 절반의 학생을 실기고사 없이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K양처럼 학생부 성적 100%만으로 선발하는 수시 2차에 지원해 합격했다. 문제는 L군의 경우 법대를 지망하다 뒤늦게 진로를 바꾼 탓에 미술 실기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L군은 1학년 때부터 실기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서 미술학원에 다녔지만 결국 한 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L군은 “입학하면 기초부터 가르쳐 주는 것으로 알았다”며 “제대 후 타 학과로 전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지도하는 교수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순수계열의 한 전공 교수는 “1, 2학년 학생 중에는 기초 조형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은 아이가 많아 수업을 진행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 교수는 “입시에서 실기고사를 폐지하려거든 입학 후 기초 조형 훈련을 집중적으로 지도할 교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익대가 미대 입시에서 실기고사를 폐지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다. 국내 최대 규모이자 최고의 엘리트 미술인 양성 교육기관인 홍익대 미대는 2010학년도부터 단계적으로 실기고사 비중을 줄여 온 데 이어 올해 입학생부터는 전면 폐지했다. 말하자면 2013학년도 홍익대 미대 합격생은 전원 실기고사 없이 입학한 셈이다.

2009년 3월 11일 당시 홍익대 권명광(權明光) 총장은 파격적인 미대 입시개혁안을 발표했다. 2010학년도 미대 입시부터 실기고사 비중을 단계별로 줄여 2013학년도에는 전면 폐지하겠다는 내용의 변혁안이었다.

홍익대는 실기고사 없이 2011학년도에는 30%, 2012학년도에는 50%를 선발했다. 그리고 올해는 860명 전원을 실기고사 없이 뽑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홍대 미대 출신 한 원로화가는 “지난 60년 동안 홍익대가 이렇듯 많은 작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실기고사를 통해 기초 조형 능력이 탄탄한 학생들을 선발했기 때문”이라며 “실기고사 없이 뽑은 학생들이 선배들의 화맥(畵脈)을 이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동문들의 우려와 달리 학교 측은 입시개혁 결과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김종덕(金鍾德)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컴퓨터로 디자인을 하는 시대에 석고소묘로 창의성을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며 “디자인은 머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얘기다.

“교육 현장에 있어 보니 실기고사 없이 들어온 학생들이 기초수업을 하는 1, 2학년 때는 실기에서 다소 밀리지만 전공수업을 하는 3, 4학년 때는 오히려 뛰어나더군요. 디자인 학부의 경우 실기가 뛰어난 학생과 머리가 좋은 학생이 섞여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교수와 시간강사들은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순수계열의 한 교수는  “실기고사 없이 학생을 선발하다 보니 프로미술인을 양성해야 하는 대학에서 고교 과정에 마스터해야 할 기초를 가르치고 있다”고 푸념했다.

수년 동안 홍익대에서 강의를 해 왔다는 또 다른 강사는 “홍익대 학생들의 실기 수준이 갈수록 떨어진다”며 “장미를 그리라 했더니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사진을 보고 모사하더라”며 기막혀했다.

홍익대가 미대 입시에서 실기고사를 폐지하면서 가장 변화가 심한 곳은 홍익대 앞 미술학원 거리다. 과거에 비해 미술학원이 줄어들기도 했거니와 밤이면 학생들을 태워 가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던 학원버스 행렬도 사라졌다. 해마다 치르던 실기대회가 없어진 후 중고생이 많이 찾던 분식집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대전에 있는 한 인문계 고교 미술교사는 “그림은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감각이 있어야 그릴 수 있다”면서 “학과성적은 좀 떨어지지만 미술 재능은 뛰어난 아이들이  홍익대 같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홍익대 출신인 이덕한 서울예고 미술부장은 “기본적으로 미대 지망생이라면 기초 조형 능력은 갖춰야 할 것 같다”며 “실기고사를 폐지하기보다는 20% 정도로 축소해서라도 반영하는 쪽으로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홍익대 판화과 90학번인 남천우(南天祐) 전 인디애나주립대는 “재능과 머리를 동시에 보는 것이 입시”라며 “학생들의 잠재된 ‘끼’와 ‘열정’을 찾는 홍익대만의 맞춤형 입시가 개발되었으면 하는데, 그러려면 교수들이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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