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적기가(赤旗歌)

조선일보
  • 김광일 논설위원
  • 김도원
    입력 2013.08.30 03:02

    1889년 '노동 지도자'란 영국 신문에서 일하는 37세 짐 코넬이 열차에 올라탔다. 사회민주연합당 강연을 듣고 오던 길이었다. 콧수염을 짙게 기른 코넬은 런던 체링크로스역에서 뉴크로스역까지 30분 동안 노랫말 '붉은 깃발(The Red Flag)'을 적었다. 6연(聯) 44행이나 됐다. '인민의 깃발은 한없이 붉었네/ 그 깃발이 순교자의 주검을 감싸네/…/ 비겁한 자가 주춤하고 반역자가 코웃음 칠 때/ 우리는 붉은 기가 나부끼게 지키리라.'

    ▶아일랜드 출신 코넬은 열여덟 살 때 이미 더블린에서 부두 노조를 만들려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어디도 받아주는 데가 없자 런던으로 왔다. 그가 '붉은 깃발'을 지었던 무렵 런던은 부두 노조 파업이 절정이었다. 그는 '화이트 코케이드'란 노래 운율을 염두에 뒀으나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 민요 '탄넨바움(전나무)' 곡조에 맞춰 불렀다. '소나무'라는 제목으로 우리 음악 교과서에도 실린 노래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만물상 일러스트

    ▶'붉은 깃발'은 급속히 번졌다. 아일랜드 토지연맹당이 농민 봉기에 앞장섰을 때 많이 불렀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도 입에 붙이고 살았다. 1920년대 남아공 백인 광부들이 공산당 사주로 유혈 폭동을 일으켰을 때 '붉은 깃발'이 울려 퍼졌다. '붉은 깃발'은 국제 노동계에서 성가(聖歌) 대접을 받았다. 영국 노동당이 1945년 총선에서 이겼을 때 하원 의사당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요즘 '붉은 깃발' 패러디는 수십 종이 넘는다.

    ▶내란 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조직원과 비밀회합을 가질 때 북한 혁명가요 '적기가(赤旗歌)'를 불렀다고 한다. '적기가'는 코넬의 '붉은 깃발'과 거의 같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비겁한 자야 가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통진당은 당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던 당이다. 진상이야 더 밝혀지겠으나 애국가 대신 적기가를 불렀다면 그의 머릿속이 그냥 보인다.

    ▶4분의 3박자 '붉은 깃발'은 1920년대 일본에서 행진곡풍 '아카하타노우타(赤旗の歌)'가 됐다. 1930년대 조선에 건너와 공산주의자에게 반향이 컸다. 해방 후 1945~1948년 좌익에겐 공산혁명 찬양가였고, 우익에겐 소름 끼치는 노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김일성 찬양 노래를 만들 때 반드시 '적기가 정신'을 반영하도록 했다. 대한민국 땅에서 붉은 깃발 지키며 국회의원으로서 누릴 만한 혜택을 다 누리는 사람이야말로 적기가가 가장 혐오하는 '비겁한 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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