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옆집 여자'의 위험한 고백

조선일보
  • 김윤덕 여론독자부 차장
  • 이철원
    입력 2013.08.06 03:04

    백발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하이힐에 쫄바지 입은 여인
    노망난 할머닌 줄 알았더니 '인생 반전' 이룬 여인이네

    "너무 반듯하게 안 살아도 돼… 한 번쯤 일탈도 사는 재미지"

    김윤덕 여론독자부 차장 사진
    김윤덕 여론독자부 차장

    그녀를 만난 건 폭우가 몰아치던 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야근으로 파김치 돼 꼬부라져 있자니, 유령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 푸른 형광등 아래 여인이 서 있다. 새하얀 모시 저고리에 온통 백발, 아니 그 한 뭉텅이를 보랏빛으로 물들인 모습에 '헉!' 소리가 절로 났다. 한 팔엔 털북숭이 개 한 마리 안겨 있다. 백지장으로 얼어붙은 '이웃'에게 여인이 목 인사를 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천둥번개 요란한 빗속을 뚫고 그녀,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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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새로 이사 온 '옆집 여자'를 불평한 건 한 달 전부터다. 처음엔 그놈의 갈색 푸들 탓이었다. 성미가 어찌나 고약한지 귀에 선 발걸음 소리만 들리면 악을 쓰고 짖어댔다. '털 달린 것'이면 '질색팔색'을 하는 어머니는 그 집을 지날 때마다 욕을 한 바가지씩 퍼부었다. "이사를 와도 우째 저리 암상스러운 물건이 들어왔노?"

    한번은 경로당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다. "저 집 할망구 하고 다니는 품새가 요상하더니, 남편 자식도 없이 저 빌어먹을 개랑 둘이 산다더라. 결혼을 안 한 건 아니고, 다 늙은 남편 돈 못 벌어 온다고 쫓아냈단다. 모질디 모진 어미가 미워서 자식들이 의절을 했다지. 하긴 행색 좀 봐라. 뾰족구두에 쫄바지 조여 입고 궁둥이를 흔들면서 걷는다.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저 여편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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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다시 본 건 모처럼 햇살이 먹구름을 뚫고 나온 어느 주말, 동네 놀이터에서다. 당최 집에 갈 생각을 않고 놀이터를 휘젓고 다니는 딸아이를 지켜보다 깜빡 졸았는지, "아이, 예뻐라"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녀였다. 과연 어머니 말씀대로다. 꽃무늬 진에 물색 카디건을 걸치고, 통굽 샌들을 신었다. 보랏빛 브리지는 그사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금줄 두른 양산을 접고 그녀가 앉았다. "천사가 따로 없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프지." 여인에게서 진한 장미향이 풍겼다.

    "마실 다녀오시나 봐요?"

    "매주 토요일 아이들을 만나요."

    "손주들요?"

    "아니, 공부방 아이들. 날 '이야기 할머니'라 부르는 천사들."

    어머니의 최신 첩보는 '그 할망구 사귀는 영감탱이가 있다더라'였다. '주말이면 동트기도 전에 호화찬란히 차려입고 외출을 나선다더라'였다.

    "옷을 참 곱게 입으시네요."

    "고것들도 눈이라고 울긋불긋 차려입어야 좋아라 해요. 허여멀거면 눈길도 안 줘요. 호호."

    기사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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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여인이었다. 규율 잡는 학생부장만 15년을 했단다. 태어나 신발 뒤축 구겨 신은 적 없고, 무릎 위로 치맛단 올라간 적 없단다. "교직 40년에 분칠 한번 해본 적 없다면 믿겠어요?"

    그녀가 '변신'을 도모한 건, 나이 육십에 믿었던 서방님에게서 기똥찬 '선물'을 받고 나서였다. "여자가 있더라고. 나 몰래 3년을 만나 온. 소처럼 우직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범생인 줄 알았더니, 그이도 사내더라고요."

    남편을 내쫓은 건 사실이었다. "미안해"라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했다. "차라리 오리발을 내밀지. 사랑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할 것이지." 남편이 짐을 싸서 고향 마을로 내려간 날, 그녀는 생애 처음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너무 반듯하게 사는 거, 위선이더라고. 그야말로 백치 인생을 살았지 뭐야. 한 번쯤 일탈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던걸. 우산 없이 비 쫄딱 맞으며 걸어보는 것도 사람 사는 맛이던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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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애를 그야말로 잡더군요."

    "공부를 워낙 안 해서요."

    "출세시켜 봤자 사돈집 아들 되는걸, 뭘 그렇게 아득바득 가르쳐요?"

    "욕심이 없어서요. 세상은 험한데 바보처럼 착하기만 해서."

    "따뜻한 마음 타고나는 것도 능력인걸. 어쩌면 이 냉혹한 세상 이겨낼 가장 강력한 무기인걸."

    "……."

    "아들 셋인데 의사인 맏이, 사업하는 둘째보다 연극에 미쳐 허구한 날 밥 굶고 여태 장가도 못 간 막내아들이 제일 행복해 보여요. 갇힌 구석, 집착하는 데라곤 없이 자유롭지요. 꼬박꼬박 전화 걸어주는 것도 그 애뿐이고."

    "……."

    "아이의 따뜻한 심장을 얼어붙게 하려고 발버둥치지 말아요. 죄예요. 중죄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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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다 지친 아이가 그만 가자며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다음 주말 차 한잔하시겠느냐고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밥은 어떻게 지어 먹고 사는지 한 번은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서. 화류계의 여인으로 거듭난 조강지처 보고 어떤 표정 지을지 궁금해서, 호호!"

    "그새 용서하신 거예요?"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해야 하고…. 그 또한 인생일까요."

    정호승의 시(詩)였다.

    "복수는 할 거예요. 다음 생에 꼭 다시 만나 그이의 눈에서, 아니 심장 한복판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만큼 아프게 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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