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나 그 가족이 아니면서도 치매를 이겨내기 위해 환자들과 함께 땀 흘리는 이들이 있다. 치매 환자들을 위해 매달 부천시립노인병원에서 '색소폰 연주회'를 여는 안상순(68)씨, 경남 창원의 요양병원을 돌며 25년째 치매 노인들 몸을 씻기고 있는 유외조(여·73)씨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이 칠십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우린 이미 복 받은 사람"이라 했다. 본인이 치매를 앓고 있지도, 치매 환자를 가족으로 두지도 않았지만, 치매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이웃의 일'이자 '우리의 일'이라 했다. 그래서 치매 자원봉사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치매 친구 위한 '특별한 연주회'
지난달 25일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부천시립노인병원. 오후 1시가 가까워오자 3~5층 병실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간병인 손을 잡고 1층 주간보호센터로 향했다. 보행기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거동이 힘든 환자들까지 50여명이 모였다. 이날은 매달 한 차례씩 열리는 안상순씨의 '치매 환자들을 위한 색소폰 연주회'가 13회를 맞는 날이다. 그의 연주가 있는 날에는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치매 환자들도 군말 않고 침대에서 일어날 만큼 연주회의 인기는 높다.
안씨가 병원에서 색소폰 연주를 시작한 건 이곳에서 지내는 고교 동창 김모(68)씨를 만난 작년 여름부터다. 김씨는 6년 전 치매 판정을 받았고, 곧이어 파킨슨병까지 앓게 됐다. 문병을 온 안씨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친구 모습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 안씨는 "어떤 자리든 분위기를 잘 띄우고 노래도 끝내주게 부르던 그 친구가 종일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때 6년 전에 배워둔 색소폰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안씨의 색소폰 연주는 노래방 기계 반주와 함께한다. 안씨가 이날 첫 곡으로 친구 김씨의 애창곡인 '갈대의 순정'을 연주하자, 김씨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김씨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색소폰 반주와 어우러져 주간보호센터에 울려 퍼지자 다른 환자들도 박수를 치고 어깨춤을 추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김씨의 노래가 끝나자 올해 75세인 강모 할머니가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치매 증세가 심해 본인 이름과 주소도 모르고 가족도 못 알아보지만 자신의 '18번' 가사는 모니터를 쳐다보지 않는데도 정확했다. 김영숙 요양보호사는 "노래 부르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며 "기억을 다 잊어버렸다지만 이때만큼은 가장 즐겁고 좋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병원 두 곳에서도 연주 봉사를 하는 안씨는 "사람들은 치매 환자가 감정도 느낌도 없는 줄 알지만, 노래 부르고 박수 치는 모습을 보면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며 "앞으로 건강관리와 색소폰 연습 열심히 해서 생이 다할 때까지 치매 환자들을 위한 연주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25년째 치매 환자 씻기는 73세 할머니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 있는 희연병원. 올해로 25년째 치매 환자 목욕 봉사를 하는 유외조씨는 병원에 오자마자 씻기 싫어 하는 노인들 설득부터 시작했다. "얼른 씻고 예쁜이 돼야지. 오늘은 제일 예쁘게 씻겨줄게." 계속 고개를 젓던 한 환자가 결국 30분 만에 유씨를 따라나섰다. 유씨는 "내가 훗날 치매에 걸렸을 때 주변에서 바보 취급 하면 얼마나 속상하겠느냐"며 "설득할 때도, 목욕 중 실례한 환자를 달랠 때도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씨는 일주일에 6일을 병원 3곳에서 목욕 봉사를 한다. 지난 25년간 거의 거르지 않고 하루 평균 6~7명을 목욕시켰다. 처음 봉사에 나선 건 우연히 찾은 노인병원의 노인들을 보며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유씨는 "부모님 살아계실 적에 이렇게 목욕을 시켜 드리지 못한 게 한이 됐다"며 "목욕 봉사를 하면서 참 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새로 생겼다"고 말했다.
유씨는 "목욕하는 어르신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며 "나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 했다. 가끔은 치매를 앓던 노인이 순간 정신이 돌아와 유씨에게 "고맙다"고 말하기도 한다.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환자도 있었다. 유씨는 "사람이 늙고 병드는 건 세상 이치인데 그러기 전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