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8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자택에 화염병을 던진 혐의를 받고 있는 회사원 임모(36)씨에 대해 검찰이 재(再)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앞서 법원은 지난 5월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에 대해선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피의자를 범인으로 특정하기 어려워 범죄 혐의에 관한 소명이 부족하다"며 기각했었다. 법원은 이번에 구속영장을 발부한 이유로 "보강된 증거에 비추어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임씨가 증거 인멸 및 도주할 우려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첫 번째 영장을 청구할 때보다 진전된 증거가 확보됐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에 영장이 발부된 것은 피의자 임씨의 일부 진술이 허위로 드러난 데다, 국내에 처음 도입된 걸음걸이 분석 기법이 큰 역할을 한 덕이다. 첫 번째 영장이 기각된 가장 큰 이유는 원 전 원장 집 주변에서 촬영된 CCTV 화면 화질이 좋지 않았고, 화면에 찍힌 인물이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 관악경찰서는 추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걸음걸이를 통해 피의자를 특정해내는 영국의 법의학 전문가이자 런던메디컬센터(LMC) 족병학과 의사 헤이든 켈리(Haydn Kelly) 박사가 한국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켈리 박사는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초청으로 대구에서 열린 법의학 세미나 참석차 방한해 있었다.
관악경찰서 측은 복면을 쓴 용의자가 찍힌 CCTV 영상과 피의자 임씨가 사건 당일 집에 들어가는 영상, 경찰에 출석했을 당시 모습 등이 담긴 동영상을 켈리 박사에게 보냈다. 이를 본 켈리 박사는 "오른쪽 무릎이 약간 바깥쪽으로 휘어져 걷는다"고 분석했다. 켈리 박사는 "뛰는 장면은 안 된다" "카메라가 움직여서도 안 된다"는 등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추가 영상을 요구했고 경찰은 20여개 영상을 줬다. 그 결과 "영상 속 인물이 동일인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서를 받아냈다. 이 소견서는 경찰이 두 번째 구속영장을 신청할 때 제시됐고, 유력한 증거로 인정됐다.
켈리 박사는 족부(足部)의학(podiatry) 분야 전문가다. 2000년 7월 걸음걸이를 통해 특정인을 구별해내는 걸음걸이 분석(gait analysis)을 창시했고 이 점을 인정받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걸음걸이 분석은 사람마다 신체적 특징과 습관 등에 따라 독특한 걸음걸이가 있다는 데 착안한 법의학의 새 분야다. 이미 영국에서는 20여명의 걸음걸이 분석 법의학 전문가가 활동하면서 피의자를 특정하는 데 걸음걸이를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지난 3월엔 캐나다 법정에서 켈리 박사의 걸음걸이 분석 결과가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번 걸음걸이 분석이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경우 아시아 최초 사례가 된다.
현재 경찰은 또 다른 사건에도 걸음걸이 분석을 적용하기 위해 켈리 교수에게 관련 동영상을 보내놓은 상태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최용석 계장은 "걸음걸이 분석은 주로 CCTV 영상 같은 동영상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현장에 가지 않고도 분석을 진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며 "지난번 건은 국내 최초라는 명분으로 공짜로 판독을 의뢰했는데 앞으로 관련 문의가 많아지면 켈리 박사에게 판독료를 지급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외에도 범인 검거를 위해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다양한 분석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국내 거의 모든 신발 및 타이어의 자국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범인 식별에 활용하는가 하면, 현장 증인의 동의하에 최면수사로 용의자를 감별하고 차량 번호판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