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人] 政·財·언론·교육계 넘나든 '소탈한' 한국 현대사 巨木

조선일보
  • 이용수 기자
    입력 2013.07.05 03:05

    어제 省谷 김성곤 선생 탄신 100주년 행사… 그는 누구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1913~1975) 선생은 쌍용그룹 창업자이자 4선 국회의원, 언론사 경영인, 사학재단 이사장으로 1960년대 정(政)·재(財)·언론·교육계를 주름잡은 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다.

    1913년 8월 15일 경북 달성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성곡은 8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축구·유도 실력이 뛰어나 '달성 장사'로 불렸다. 대구고보 시절 항일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지만, 운동 특기생으로 보성고보 편입시험을 통과했을 정도다. 나중에 대한유도회장(3·7·8대)에 오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상과(商科) 1학년 때 교장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밀짚모자를 쓴 채 안암동 캠퍼스에서 잡초 뽑는 것을 보고 "나도 장차 이런 육영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는 기업(경성방직)을 발판으로 교육가(고대)·언론인(동아일보)으로 이름을 떨친 인촌을 '롤 모델'로 삼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순시 때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성곡 김성곤(박 대통령 뒤 콧수염이 난 분) 선생이 박 대통령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순시 때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성곡 김성곤(박 대통령 뒤 콧수염이 난 분) 선생이 박 대통령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이후락 비서실장이 보인다. /성곡언론문화재단 제공
    성곡은 졸업 후 대구상공은행에 입사했으나 곧 그만두고 1938년 비누공장(삼공합자회사)을 세워 재계에 투신했다. 경영의 감을 익힌 성곡의 승부수는 금성방직 설립(1948년)이었다. 성곡은 전후 금성산업 설립(1954년), 태평방직 인수(1956년), 쌍용그룹의 모태가 된 쌍용양회 설립(1962년)을 통해 재벌 기업인 대열에 합류했다.

    성곡은 영남일보 창간(1945년)에 관여했던 경험을 살려 1952년 대한통신을 인수해 동양통신(연합통신의 전신)을 세웠다. 당시 외신 공급사인 UP통신(UPI의 전신)과 체결한 계약서에 성곡은 'S.K.KIM'이라고 서명했다. SK가 평생의 애칭이 된 것은 이때부터다.

    언론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합신문사(1954년)와 대구문화방송(1971년) 인수 외에, 1965년엔 성곡언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일상에 바쁜 언론인에게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자"는 성곡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언론 공익재단이다.

    재단이 본궤도에 오르자 성곡은 1967년 학계에도 지원이 필요하다며 성곡학술문화재단을 세웠다. 당시 그는 "내가 관여하는 국민대학(1959년 인수)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당선(경북 달성·자유당)으로 시작된 13년간의 정치인 생활은 영욕이 교차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 공화당 소속으로 6·7·8대 의원을 지낸 성곡은 1965~1971년 박 정권의 정치자금을 주무르는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지내며 '막후 실력자'로 불렸다.

    성곡은 당시 공화당 내 '반(反) JP(김종필) 라인'인 '4인 체제'의 주축이었다. 4인 체제와 JP의 알력은 결국 1971년 '10·2 항명파동'에서 절정에 달했다. 성곡은 야당인 신민당이 JP계 인사인 오치성 내무장관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자 이를 부결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고 자파 의원을 동원해 가결했다.

    박 대통령의 격노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성곡은 의원직 사퇴서와 탈당계를 제출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때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이 뽑히는 봉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미국 보스턴에서 '망명객' 생활을 하던 성곡은 1972년 11월 귀국해 쌍용양회 회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8대)에 올랐다.

    고대 교우회장이기도 했던 성곡은 1975년 2월 25일 서울 신문로 자택(현 성곡미술관)에서 고대 졸업식 축사 원고를 읽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세 아들 모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장남 석원(전 쌍용그룹 회장)은 미국 출장, 차남 석준(현 쌍용건설 회장)은 해병대 복무, 셋째는 석동(전 쌍용투자증권 회장)은 미국 유학 중이었다.

    지인들은 성곡을 '소탈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과묵했지만 "별일 없제?"란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1985년 발간된 '성곡 일화집'의 제목이 '별일 없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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