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울에서 월드컵 최종 예선 한국·호주 경기가 벌어졌다. 앞서 원정 경기는 0대0으로 비겼다. 한국은 본선 꿈에 부풀었다. 홈경기를 이겨야 했다. 우리에겐 190㎝ '꺽다리 공격수' 김재한이 있었다. 전반 15분 김재한이 공을 가로채 선취 골을 터뜨렸다. 3만 관중은 응원가로 '빨간 마후라'를 부르다 환호에 파묻혔다. 진공관식 흑백 TV 앞에서 동네방네 사람들도 뒤집어졌다. 추가 골까지 따냈지만 다시 두 골을 내주고 3차전에서도 져 탈락하고 말았다.
▶70년대 김재한은 '공포의 포스트 플레이'를 펼쳤다. 상대 골문 앞에 말뚝처럼 박아놓고 그의 이마를 향해 공을 띄우면 아시아 단신 수비수들이 겁을 냈다. 차범근도 대표팀에 있었지만 A매치 최고 골잡이는 김재한이었다. 그의 머리에서 골이 터지면 전국이 들썩였다. 그제 밤 2014 월드컵 최종 예선 한국·이란전에서 팬들은 40년 전 포스트 플레이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196㎝ 공격수 김신욱 머리 위로 단조롭게 퍼올리는 센터링에 맥이 탁 풀렸다.
▶팬들은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이란은 방어로 일관하다 후반 15분 우리 수비수 실수를 틈타 단 한 방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그대로 1대0 승부를 결정지었다. 한국은 지난 원정 경기도 이란에 졌다. '연패(連敗)의 쓴잔'을 마신 셈이다. 축구란 FIFA 랭킹 40위 한국이 67위 이란에 질 수도 있다.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팀은 패기도 오기도 없고 호흡도 엇갈렸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2006년 월드컵 예선 때도 한국은 사우디에 두 번이나 지고 본선에 나갔다. 감독도 프레레에서 아드보카트로 갈렸다. 그래도 이번처럼 정신줄마저 놓아버린 경기는 없었다. 최강희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을 때부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억지 춘향' 격인 감독 밑에서 여러 겹 불화설도 끊이지 않았다. 물론 팀 주축이 20대 초반이고 세대교체 중이라 불안정했다. 그래도 태극 마크를 단 '국가대표'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무찌른 뒤 말했다. "워털루 싸움은 이튼스쿨의 축구 운동장에서 이겼다." 지금도 축구 A매치는 국가의 기세를 드러낸다. 져도 좋다. 투지와 전략을 보고 싶다. 여덟 대회째 연이어 월드컵 본선에 나간다고 '쾌거'라고 하기에 낯뜨겁다. '아시아 맹주'라는 명찰도 부끄럽다. 탁구 영웅 이에리사 선수는 말했다. "선수는 경기에 진 뒤 연습했던 만큼 눈물을 흘린다." 축구 대표팀에도 홀로 눈물을 삼키는 선수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