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中日)전쟁 때인 1938년 중국 윈난성 쿤밍에 '시난연합대학'이 설립됐다. 베이징대·칭화대·난카이대, 중국 세 명문대가 전란을 피해 함께 세운 임시 피란 학교였다. 학생들은 판잣집이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수업하다 일본군 공습 경보가 울릴 때마다 뒷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어느 교수는 당장 먹고살기가 막막해서 빨랫비누를 만들어 거리에 나가 팔기도 했다. 물리학과 교수 자오중야오(趙忠堯)였다.

▶자오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핵물리학자로 주목받던 신진 학자였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며 1932년 귀국해 칭화대 교단에 섰다. 그는 변변한 실험 설비도 없는 환경에서 연구하며 미래 중국 과학계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키워냈다. 1957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전닝(楊振寧)과 리정다오(李政道), 중국 원자탄 개발 주역 첸싼창(錢三强)이 그의 제자다.

▶중국 과학기술의 토대를 쌓은 또 다른 인물로 첸쉐썬(錢學森)을 빼놓을 수 없다. 최고 로켓 전문가에 꼽히던 미 국방부 과학고문 첸 박사가 귀국하려 하자 미국은 그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5년 동안 억류했다. 미국과 중국은 막후 협상 끝에 첸 박사와 6·25 때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들을 맞바꿨다. 1955년 귀국한 첸은 중국의 첫 미사일 둥펑(東風)부터 최근 유인 우주선까지 우주 개발을 지휘하며 평생을 헌신했다.

▶미국에서 받던 최고 대우를 뿌리치고 조국을 위해 달려온 과학자들에게 중국 역대 지도부는 성의를 다했다. 1960년대 중반 살벌한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첸 박사를 비롯한 과학자 명단을 군(軍)에 보내 "(홍위병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도 2009년 첸 박사가 숨질 때까지 해마다 찾아가 깍듯이 인사했다. 총리를 비롯한 다른 지도자들도 원로 과학자를 찾는 게 관례가 됐다.

▶중국 지도부가 과학기술에 관심과 애정을 쏟으면서 중국 이공계 인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린 창정(長征) 로켓과 우주정거장 톈궁(天宮)의 설계자를 비롯해 지금 중국 우주개발 주역은 1980년대 출생자를 가리키는 '바링허우(八零後) 세대'다. 15만명에 이른다는 중국 우주항공 분야 연구원 중 이 신세대 인재들이 10만명을 넘는다. 1세대 과학자들의 애국심과 국가의 전폭 지원, 10만 연구원의 젊은 패기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당기면서 중국이 우주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