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국문학이 정유정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단지 이 작가의 전작 '7년의 밤'(2011)이 거둔 대중적 성공 때문만은 아니다. 날로 초라해지는 한국문학 시장에서 30만부 작가의 등장도 놀랍지만, 내면과 자의식에 침잠하던 한국문학에 '닥치고 이야기'라는 돌파구를 거침없이 제시했다는 대목이 더 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단순히 '재미'를 넘어, '의미'를 포기하지 않은 질문이기도 했다.

올해 한국문학 최대의 기대작 중 하나로 꼽히는 정유정의 장편소설 '28'(은행나무)이 16일 출간된다. 지난 주말 먼저 읽고 내린 결론은, 다시 한 번 '재미'와 '의미'를 함께 누리는 문학적 쾌락을 경험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496쪽의 방대한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빨간 눈' 괴질로 봉쇄된 서울 외곽도시 화양에서 일어난 28일간의 드라마다. '빨간 눈' 괴질은 사람과 개가 서로 전염시키는 인수(人獸)공통전염병. 전염력은 홍역(98%) 수준이고 치사율은 에볼라(50~90%) 수준의 치명적 괴질로, 발병 초기 눈자위가 핏빛으로 변하는 게 특징이다. 일단 빨간 눈으로 변한 뒤 한나절이면 거의 예외 없이 폐출혈이 일어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정유정의 신작이 '전염병'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것이 일찌감치 예고되면서 작지 않은 우려가 있었다. '연가시' '세계의 끝' 등 이런 소재의 영화·드라마·소설들이 유행하면서 이 장르에 대한 독자의 피로감이 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괴질을 퍼뜨린 세력을 일망타진하고 치료제를 찾아내는 영웅담으로 '28'을 마무리했다면, 당신의 우려는 적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친숙한 재난 스릴러 문법을 야멸스럽게 배반하고, 우리가 무의식의 괄호 속에 밀어 넣었던 질문을 하나둘씩 꺼낸다.

당신의 목숨은 타인(혹은 동물)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가.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면, 그 죄책감과 부채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말해 생명의 도덕적 근거, 그리고 구원과 희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인 것이다.

정유정은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기 위해 화양의 지도를 수북하게 그렸고, 28일간의 일정표를 꼼꼼하게 작성했다. 주인공의 동선과 사건 동선에 맞춰 수채 색연필로 그린 세밀화와 확대도가 한꾸러미다.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따라서 '28'에는, 반전으로 승부하는 영화·소설의 금기(禁忌)처럼 어느 수위 이상의 내용을 공개하면 안된다는 스포일러 유포의 부담이 없다. 인수공통전염병은 설정과 미끼일 뿐이고,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죽음과 맞대면한 존재들의 공포와 광기, 사랑과 존엄, 절망과 희망이기 때문이다. 알래스카에서 베링해까지 1100㎞를 달리는 세계 최대의 개썰매 경주에서 16마리 썰매 개를 송두리째 죽이고도 살아남았던 재형, '빨간 눈'이 창궐하는 화양에서도 살아남았던 이 초인적인 수의사가 왜 마지막에 죽음을 선택했는지, 당신은 그 결론보다 과정에서 이 책을 읽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유정의 새로운 플롯 실험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28'은 재형을 포함한 6명의 주인공 각자가 발언하는 3인칭 다중시점. 심지어 6명 중 하나는 팀버울프 혈통의 늑대 개다. 주인공이 늘어날수록 감정이입의 집중력은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접속사를 전혀 쓰지 않는 고집과 특유의 단문으로 이 장애물의 돌파를 시도한다. 살인자의 아들이었던 '나'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던 '7년의 밤'과 직접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책장 넘기기 바쁠 정도로 흥미진진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라는 영예로운 월계관은 굳이 내려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100m를 전력 질주하는 듯 빠르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불꽃놀이다.


☞정유정은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세 권의 장편을 통해,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시선'이 됐다.

작가는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들이 생매장을 당하던 몇해 전 구제역의 겨울이 ‘28’ 탄생의 씨앗이었다고 했다. 산 채로 파묻힌 수백 마리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동영상을 보면서, 그는 되뇌었다. “우리는 천벌을 받을 거야.”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식 문학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지방 병원 응급실 간호사 출신. 특히나 이번 소설에서는 그 이력이 대단한 강점이 됐다. 시시각각 생명과 싸우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간호사 출신 작가의 과거 삶이 곳곳에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