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지나면 컴퓨터도 못 하고, 전화도 못 하게 돼. 물건 정리도 안 돼. 급기야 아무것도 못 하게 되지. 가족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 점점 모든 기억이 다 지워지게 되지." 2004년 개봉한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의사가 치매에 걸린 주인공 수진(손예진)에게 하는 말이다. 수진은 얼마 안 있어 의사 말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치매는 영화나 드라마 단골 소재다. '기억이 사라진다', '어른이 아이처럼 변한다'는 치매 증세가 극적인 요소로 활용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치매는 극 중에서 '절망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2011년 방영된 드라마 '천일의 약속'의 주인공 서연(수애)은 치매 진단을 받고 "그러니까 저는 이제부터 약은 먹어도 별 볼 일 없이 말라가는 호두 속 알처럼 뇌가 쪼그라들어 어처구니없는 바보가 됐다가 5~6년 안에 죽는다는 얘기죠"라며 절망한다. 서연도 얼마 안 있어 어이없는 실수를 반복하는 상태가 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천일의 약속' 주인공이 걸린 치매는 '가족형 알츠하이머 치매'다. 유전적 요인이 원인인 치매로 진행 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수개월 만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족형 알츠하이머 치매가 전체 치매 중 1%밖에 안 되는 희귀 치매이고, 다른 치매에 비해 진행 속도가 빠르긴 해도 약으로 이를 충분히 늦출 수 있다. 김희진 한양대 의대 교수는 "가족형 알츠하이머 치매도 초기부터 꾸준히 약을 먹으면 5~10년이 지나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며 "드라마, 영화에선 10~15년에 걸친 치매 증상이 불과 몇달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지적했다.
치매 판정을 받고 절망하는 극 중 인물 대부분이 치매 초기 상태라는 것도 시청자가 미처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다. 영화, 드라마 속 인물 대부분이 가벼운 건망증이 반복돼 병원을 찾았다가 치매 통보를 받는데, 이들의 상태가 중증이 아니라 초기라는 것이다. 초기 치매는 약만 꾸준히 먹으면 수년이 지나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치료 방법을 묻는 주인공에게 의사는 "약을 먹으면 진행을 좀 늦출 수는 있지만 그것뿐이야. 회사 다니시나? 빨리 그만두시게"라고 답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답변이다. 김 교수는 "'약만 먹으면 지금처럼 회사에 다니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게 맞는 답변"이라며 "치매 상태만 따지면 주인공은 이른 시기에 치매를 발견한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말했다.
극 중에서 행패를 부리는 치매 환자의 공격적인 행동은 어떨까. 2011년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 등장하는 치매 노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심한 욕을 하고, 썩은 음식을 준다며 밥상을 뒤엎고, 며느리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이런 행동은 실제 치매 환자가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와 다른 점도 있다. 김기웅 국립중앙치매센터장은 "치매 환자의 공격적인 행동은 일부 환자에게서만 나타나고, 그것도 한두 달 약물치료를 하면 금방 상태가 호전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처럼 치매 환자의 공격적인 행동이 전혀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 센터장은 "극 중에서 치매가 다소 과장되게 비극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소재가 극적으로 활용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치매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시켜 달라고 일일이 요구하기는 어렵다"며 "암(癌)은 치매보다 극 중에서 훨씬 더 많이 나오지만 암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희진 교수는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인기를 끌 때에는 치매 검진율이 확 올라가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반대로 치료를 포기하는 치매 환자도 있었을 것"이라며 "드라마·영화를 보고 치매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선 국민이 치매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