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장이 법의 심판을 받는 악순환이 다시 되풀이되는 양상이다. 지난해 대선 직전 폭로된 국정원 심리정보국 소속 여직원의 인터넷 댓글 작업이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에 따른 조직적인 정치 개입 활동으로 드러났고, 경찰이 사건 전모를 축소·은폐해 발표했다는 것이 검찰 수사의 결론이라고 한다. 검찰 수사팀은 국정원 직원들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특정 정당 및 대선 후보와 관련된 댓글을 올리는 방식으로 정치 개입을 하는 데 사용한 ID를 수백개 더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를 놓고 "좌파 세력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일"이라며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선 국정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청와대나 여야 모두 '진영 논리'에 따라 정치적인 득실 계산에만 신경이 쏠린 듯하다.
하지만 정치적 시비나 복잡한 법률 논쟁에서 한발 물러서서 '국가안보 자원의 무단 전용'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최소한 몇 가지 교훈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인력과 예산을 동원해 '심리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국정 홍보나 대통령 정무 지원의 외곽 단체 노릇을 하거나, 특정 후보 찬반 지지에 관여했다면 이번 사건은 아주 심각한 '안보 자원 무단 전용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정보원은 국정 홍보기관이 아니다. 가령 제주 강정기지 건설을 반대하거나, 4대강 사업 반대하는 캠페인에 평양 정권이나 종북 세력이 끼어들 수는 있다. 그런 경우 수사를 통해 안보 위해 세력을 적발·배제하는 일은 몰라도 여론 전쟁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국정원 직무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법 해석이다. 같은 논리로 북한의 정찰총국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해킹이나 테러를 시도할 경우에 대한 안전 관리 대책은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속하지만, 원전 추가 설치 찬반을 둘러싼 정책 시비에는 개입해선 안 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국민의료보험법을 추진하려 하는데, 야당이나 특정 이익단체들이 '오바마 흔들기'를 한다고 해서 그 여론전에 CIA나 FBI 같은 정보기관이 관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위해선 주어진 예산을 최대한 사용해도 되지만, 국내 정치 동향 보고 등 대통령의 정치 활동 지원에는 한 푼도 써선 안 된다는 것이 현행 국정원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다. 일반 회사의 시큐리티(security)를 책임지는 보안 업체는 기술 영업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하고, 하드웨어 통제가 되도록 하는 게 본연의 임무다. 그런데 대주주 경영진 보호도 시큐리티라고 해석해 경영진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나선다면, 그런 회사의 CEO는 자리 보전이 어려울 것이다. 국정원장은 국가 안보 위협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느냐를 항상 고민해야 하는 자리다. 이번 사건에서 일부 드러난 인터넷 댓글 공작 따위를 "종북 세력에 대한 심리전"이라고 우기는 것은 권위주의 시절에나 통하던 논리다.
국정원법에서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건 모두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과거 권력 남용으로 얼룩진 정보기관의 역사를 반성하고, 국가 안보 자원을 대통령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북핵 문제 등 만성적인 안보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나 국정원장이 주관적으로 안보 활동이라고 해석하는 '정권 안보'에 자원을 낭비할 정도로 여유 있는 나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