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남쪽으로 350㎞가량 떨어진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시는 중국 내 대표적인 중소기업 도시이다.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초반부터 피혁·봉제·신발 등의 분야에서 영세 중소기업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해 한때 '중국 도시 상공업자 10명 중 1명은 원저우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원저우는 가내수공업으로부터 발전했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일가족이 낡은 주택가 골목길에 나와 자리를 깔고 앉아 일에 매달리는 것이 원저우 기업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원저우 사람들은 그렇게 거부를 쌓았고, '원저우 모델'이라는 용어까지 탄생시키며 다른 도시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막상 원저우를 직접 가 보면, 이 도시의 낡은 도로와 지저분하고 우중충한 거리에 깜짝 놀라게 된다. 중국 중·서부의 낙후한 도시를 방불케 한다. 원저우시의 재정 수입은 저장성 내 도시 중에서도 꼴찌에서 몇째를 헤아린다.
어떻게 부유한 주민과 가난한 도시의 이런 기묘한 조합이 탄생했을까. 원저우 상인들은 상공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이 돈을 기업을 키우고 기술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돈 보따리를 싸들고 베이징·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로 달려가 아파트 등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렸다. 원저우에서 쌓은 부를 외지 부동산에 쏟아부으니 이 도시가 발전할 턱이 없었다. 그들이 부를 이루는 데 기반이 됐던 기업 역시 20~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영세 중소기업으로 남아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원저우 모델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고비로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중국 대도시 부동산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서 사채까지 동원한 원저우 상인들의 부동산 투기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고리의 사채를 갚지 못해 자살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기업가의 최고 덕목은 이윤 추구를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고, 기업의 성장이 사회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원저우 모델 실패의 원인은 바로 이런 기업가 정신의 실종에 있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내 사모펀드들은 요즘 한국과 일본의 기술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기술력 좋은 한·일 중소기업을 발굴해 중국 시장에 진출시키고, 이들이 중국 시장에서 성공해 기업 가치가 올라가면, 투자 지분을 되팔아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투자 제안을 받은 우리나라 중소기업가 중 상당수는 중국 측에 '지분 10~ 20%를 사느니, 차라리 기업을 통째로 인수해 가라'고 역제안을 한다고 한다. 기업 발전도 좋지만, 이미 적잖은 돈을 벌고 나이도 들었는데 다시 낯선 중국 시장에 들어가 모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창업주 2세들도 가업 승계보다 공기업 등 안정된 직장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이들은 전했다. 창업주가 70~80대의 고령으로 은퇴하면서 기업 경영을 고용 사장이 맡는 경우가 많은 일본은 상황이 더하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내건 '창조경제'의 관건은 기업가 정신의 부활이다. 식어가는 기업가 정신을 되살려내지 못한다면 '창조경제'는 자칫 공염불에 그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