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충남 천안시 J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앞으로 은행에서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대출금 2억원을 빨리 갚으라는 내용이었다. 놀란 몇몇 동(棟)대표가 입주자대표회장 정모(41)씨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처음엔 "나도 모르겠다"던 정씨는 동대표들의 추궁이 이어지자 사실을 털어놓았다. 2억원은 정씨가 아파트(주민들) 재산인 장기수선충당금을 담보로 은행에서 빌린 돈이었다.

검찰 수사 결과, 정씨는 2007년 11월 아파트 재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입주자대표회장인 자신의 도장 외에도 관리소장의 도장이 필요했다. 정씨는 "해고하겠다"고 관리소장을 협박해 도장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정씨는 금융기관 4곳의 정기예금 통장에 있던 장기수선충당금 4억7000만원을 자기 명의 은행 계좌로 옮겼다. 이를 담보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주식 투자를 하다 날리자 빌리고 또 빌려 대출금이 2억원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래프] 서울 아파트, 준공 후 얼마나 지났나·서울시 준공 30년 넘은 아파트 가구 수 변화·장기수선충당금 적립액 알고 있나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된 정씨는 2009년 말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 3000만원을 우선 변제한 정씨는 "날린 돈을 2014년까지 모두 갚겠으니 살려달라"는 각서를 썼다. 이를 믿은 주민들이 재판부에 탄원서를 내 '선처'를 받았다. 하지만 정씨는 지금까지 수백만원밖에 갚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아파트 노후화(老朽化)를 막는 공사에 쓸 수 있도록 집 소유주들로부터 걷어 적립해두는 돈이다. '목돈 관리'는 입주자대표회장이 맡는다. 따라서 장기수선충당금 '곳간 열쇠'를 쥔 입주자대표회장은 은행 지점장들에겐 최고의 고객이다.

서울의 대단지 입주자대표회장은 "은행 지점에 10억원가량만 예치해주고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동대표 야유회 협찬을 받는 일 정도는 간단히 해결된다"고 말했다.

곳간 열쇠를 쥐고 '갑(甲) 행세'를 하는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입주자대표회장이 장기수선충당금을 횡령하거나, 주민 허락 없이 이런 공사 저런 공사 명목을 만들어 써버리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T주상복합아파트 3차 단지는 최근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가 장기수선충당금을 엉뚱한 공사에 쓰겠다고 하자, 주민들이 들끓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지문 인식 출입 장치를 새로 설치하겠다며 공사 비용을 관리비에 포함해 걷겠다고 공고했다. 일부 주민이 "별 필요도 없는 공사에 왜 돈을 걷느냐"고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입주자대표회의는 "그럼 관리비 대신 장기수선충당금을 헐어서 쓰겠다"고 했다. 주민들은 "장기수선충당금은 정해진 용도에 써야 하는데 출입 장치 교체에 쓰는 것은 법 위반"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장기수선충당금 부당 집행은 일부 단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2011년 감사원 감사에선 서울시내 127개 아파트 단지 가운데 장기수선충당금을 계획 이외의 용도로 부당 집행한 곳이 81개 단지(63.8%)에 달했다. 부당 집행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공사 뒷돈 거래' 같은 의혹들이 뒤따른다. 하지만 직접적인 횡령이 적발되지 않는 이상, 최고 1000만원 과태료 부과가 가장 무거운 제재다. 준공한 지 24년 된 대전의 S아파트에선 2011년 8월부터 작년 6월까지 입주자대표회장 전모씨가 입주자대표회의 의결도 없이 공사를 5건 벌였다.

전씨는 운동기구 설치공사, 놀이터 보수공사, CCTV 설치 등을 하는 데 장기수선충당금에서 1억4300만원을 빼내 썼다. 주민들이 구청에 진정을 넣어 전씨는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받았다.


☞장기수선충당금

배관, 승강기 등 아파트 주요 시설을 수리·교체할 때 쓰는 돈이다. 미리 '장기수선계획'을 수립해 그에 따라 써야만 한다. 보도블록 교체 등 일상적 공사에 쓰는 '수선유지비'와 구분된다. 집 소유주가 내는 게 원칙이어서 세입자는 관리비에 부과된 장기수선충당금을 이사 갈 때 찾아갈 수 있다.

♣ 바로잡습니다

▲22일자 A6면 '장기수선충당금' 기사에서 서울 강남구 T주상복합아파트 3차 단지 입주자대표회의가 지문인식 출입장치 교체에 충당금을 쓰겠다고 한 것으로 보도됐으나, 충당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집 소유주가 공사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주민동의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