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국가 지급 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다. 여야 복지위 위원들이 최근 "국민의 연금 재정 불안을 덜기 위해 국민연금 지급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키자, 정부와 청와대가 반대해 국회 법사위에 법안이 계류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올리거나 연금 수령 연령을 더 이상 높일 수 없게 된다. 정부가 국민연금 지급을 보장하면 누가 보험료를 더 내려고 하겠느냐"고 주장한다. 기획재정부와 청와대는 "국민연금이 정부 부채로 잡히면 국가 신인도가 떨어진다"며 반대한다. 언뜻 보면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대단한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사정이 다르다. 공무원·사학·군인연금은 국가 지급 보장을 법에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적자가 나면 매년 국민의 세금으로 메운다는 '보전금' 조항(공무원·군인연금)과 '국가의 지원'(사학연금)이란 조항을 만들어 놓았다. 더욱이 정부가 미리 돈을 쌓아 놓아 훗날 재정 고갈에 대비하라는 '(정부의) 책임 준비금' 조항도 있다.
과연 이런 '이중의 국가 지급 보장' 조항들은 누가 법에 넣었을까. 바로 정부다. 2000년 정부 입법으로 이런 내용의 개정안을 만들어 공무원·군인·사학연금법을 국회에서 동시에 통과시킨 것이다. 공무원들은 자기들의 노후는 법에서 국가가 책임지도록 만들어 놓고는 국민연금만은 국가 보장을 해선 안 된다고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국민이 고용한 공무원들이 오히려 상전(上典)이 되어 사용주인 국민을 왕따시키는 셈이다.
정부는 국민연금 지급을 국가가 보장하면 정부 부채가 늘어난다고 아우성친다. 작년 정부 부채 902조원 중 공무원·군인연금 부채액이 절반에 가까운 437조원을 차지한다. 정부가 고용주가 아닌 사학연금은 정부의 부채 계산에서 빠져 있다. 같은 조건인 국민연금은 부채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누가 이해할까.
문제는 2033년 재정 고갈이 예고된 사학연금이다. 공무원연금과 달리 '국가가 지급한다'가 아니라 '지급할 수 있다'로 규정해놓았다. 강제 조항이 아니어서 적자가 나도 정부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현재 사학연금 가입자의 기여금(보험료) 일부를 대고 정부가 연금법에 '책임준비금' 조항까지 만들었다. 그러니 사학연금도 적자가 생기면 국민의 세금에 기대려고 할 것은 당연하다. 지금에 와서 독소(毒素) 조항을 빼라고 하면 사학연금 가입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적자에 빠진 공무원연금은 4년 전 개혁을 했다. 하지만 적자가 다시 불어나면서 올 보전금이 2조원에 달했다. 개혁 시늉만 낸 탓이다. 이처럼 개별적인 연금 개혁은 직종별 이기주의에 밀려 불가능하다는 게 지금까지의 교훈이다.
앞으로 모든 연금은 적자가 나면 정부에 손 벌릴 것은 뻔하다. 해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국민연금도 국가 보장을 명확히 하면 된다. 그래서 모든 연금이 이렇게 가다간 망한다는 공멸(共滅) 의식을 국민 모두에게 심어줘야 개혁이 가능해진다. 모든 연금을 똑같이 개혁대 위에 놓고 동시에 개혁하는 길밖에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