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씨네칵테일]‘홀리 모터스’ 속 리무진, 쓸쓸한 허영의 공간

입력 2013.04.12 14:55 | 수정 2013.04.12 15:06

사업가에서 狂人까지…리무진 타고 시내 돌며 아홉 번 변신하는 기괴한 사내의 하루 그려

겉만 화려한 리무진은 우리들 삶의 모습…영화엔 저물어 가는 것들의 안타까움 가득

'홀리 모터스'속 오스카(드니 라방)에게는 광기가 흐른다. 그 광기는 그가 마침내 광인으로 변신했을때 폭발한다. 꽃다발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오스카.

예술영화에 대한 영화광들과 대중의 반응은 종종 엇갈리지만, 레오 카락스 감독 ‘홀리 모터스’(Holy Motors)에 쏟아지는 양 극단의 반응은 정말 격차가 크더군요.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에 별 다섯 개 만점을 주고 극찬했는데, 어느 네티즌은 “돈이 아까와 미쳐버릴 뻔 했다”는 최고 수위의 악평을 올렸더군요.

‘홀리 모터스’가 낯설고 기발한 형식과 내용의 영화인 건 분명합니다. 젊은날 ‘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같은 작품으로 세계 영화광들을 열광시킨 레오 카락스가 13년만에 내놓은 작품답습니다. 만만찮은 파격과 독특한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극중 미치광이 같은 주인공이 여자 모델을 납치하는 대목에선 남성 성기의 과다한 노출이 문제가 되어 국내에서 ‘19금’ 등급을 받았지만, 야릇한 성적 묘사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영화는 전혀 아닙니다.

이 영화는 기승전결 스토리를 기대하는 관객을 당황하게 합니다. 레오 카락스의 영원한 페르소나(감독의 분신 같은 배우)인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 오스카 라는 중년 사내는 비서 셀린(에디뜨 스콥)이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파리 곳곳을 누비며 9가지 인간으로 변신합니다. 유능한 사업가로 차에 탔다가, 갑자기 거리의 거지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차에서 내릴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오스카는 광대, 걸인, 암살자, 광인(狂人), 가정적인 아버지 등 온갖 인물이 되는데 이 인물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 관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냥 서로 다른 9가지 영화의 장면들을 이어붙인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 기괴한 9가지 인생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차리기도 어렵습니다. 광인(狂人) 캐릭터의 경우 레오 카락스 감독이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도쿄!'라는 작품을 미리 보지 않은 사람은 본 사람보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대목도 영화에 여럿 있습니다. 오스카가 갑자기 자동차 밖으로 튀어나가 오스카가 연기하는 은행원을 죽이기도 합니다. 밤이 되어 귀가한 오스카를 맞이하는 것은 원숭이인 아내와 원숭이인 아들입니다.

이쯤에서 눈치채는 분들도 있겠지만, ‘홀리 모터스’는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낸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 초반에 출연한 레오 카락스 감독이 잠 자다 깨어 영화관으로 들어간 뒤 오스카의 9가지 변신이 시작되는 것에 주의해 보면, 오스카의 변신이란 아마도 감독이 꾼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가 일종의 백일몽이자 환상일수 있는 것이죠.

'홀리 모터스'에서 오스카(드니 라방)은 9가지 괴상한 인물로 변신한다. 영화 초반, 거리의 걸인이 된 오스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홀리 모터스’에서 시선을 붙드는 것 중 하나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달리며 오스카의 9가지 삶과 동행하는 흰색 리무진입니다. 기상천외한 변신술로 파리를 누비는 인물의 차량으로 감독은 왜 리무진을 택했을까요.

리무진은 별난 차량입니다. 화려한 고급차인데도 일반적 고급차와 분명히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구입하기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빌려 씁니다. 특별한 때 남에게 과시하려고 입는 턱시도 같은 예복을 닮았습니다 보통 승용차보다 길이가 2배가 넘는 리무진의 매끈하고 화려한 외양은 일견 멋있어 보이지만, 내부는 사실 별 특별함이 없습니다.

‘홀리 모터스’속 흰색의 리무진에도 그런 이중성이 엿보입니다. 오스카가 9개의 인생을 연기하기 위해 분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는 곳이어서 리무진 내부에는 조명등과 여러 의상, 소도구들로 번잡합니다. 리무진은 오스카가 광대짓을 하고 돌아와 풀썩 주저앉는 쓸쓸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리무진이란 속으로는 지저분한 내부를 감추면서 남에게 화려하게 보이고 싶어 애를 쓰는 우리들 허영 많은 삶을 닮았습니다.

레오 카락스 감독도 인터뷰에서 영화속 리무진이 메시지가 담긴 물건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리무진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현란하고 조잡한 모습이 담겨있다. 겉모습은 근사하지만 안은 마치 창녀의 호텔과 같은 슬픈 감정이 깃들어 있다.” 또한 감독은 “리무진은 과거에 가지고 놀던 오래된 ‘미래형 장난감’처럼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도 했습니다. 감독의 말을 풀면 리무진은 과거엔 사랑받고 애호됐으나 이제 쓸쓸하게 사라져가는 어떤 가치들의 상징 같은 것이죠.

'홀리 모터스'에서 주인공 오스카(드니 라방)이 타는 흰색 리무진. 고급스런 차의 대명사지만 미끈한 외부와 달리 정작 내부는 볼품없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하루 일을 마친 뒤 ‘홀리 모터스’라는 차량회사 주차장으로 돌아온 리무진들은 깜빡이로 서로 교감하며 이런 대화를 합니다. “요샌 사람들이 큰 차를 잘 알아주지 않아. 우린 곧 폐차될지 몰라….”

의미심장한 대화들은 이 영화 여러 곳에 있습니다. 살인자와 희생자 ‘연기’를 마친 오스카가 리무진으로 돌아와 분장을 지우고 있을 때 나타난 이상한 사내는 오스카게에 “지금 하는 일에 여전히 만족하세요?”라고 묻습니다. 오스카는 “옛날엔 컸던 카메라가 이젠 너무 작아져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다”며 은근히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디지털 영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카메라가 배우를 직접 촬영하는 영화 본래의 맛과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홀리 모터스’가 잊혀져 가는 영화의 마법 같은 아름다움을 환기시키려는 작품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정답이 하나 밖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라져가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한탄을 이 영화에서 읽었습니다.

‘홀리 모터스’는 쉽지 않은 예술영화지만 관객을 ‘고문’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영화처럼 신비롭고 자극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들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영화도 근래에 없었던 듯합니다. 물론 우리 관객 대중들에게 두루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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