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상] 잡화상 딸, 쌍둥이 엄마, 최장수 英총리… 國運걸린 일, 타협 없던 鐵女

조선일보
  • 박영석 기자
    입력 2013.04.09 03:03

    [대처 前영국 총리, 치매 투병하다 뇌졸중으로 별세]
    첫 여성 보수당 대표·총리, 11년 반 동안 총리 재임 기록

    -"협상은 협잡이다"
    1984년 전국광부노조 총파업, 원칙 지키며 끝내 항복 받아내
    1981년 IRA 옥중 단식 투쟁… 10명 餓死에도 냉정하게 대처
    -강인함 속 모성 리더십도
    아르헨과 포클랜드 전쟁 때 我軍 전사자 가족 255명에 일일이 자필 위로 편지 보내

    "나는 평생 전쟁을 벌이며 살았다."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3선·1979~90년 재임)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회고했다. 그리고 "싸움에 나섰을 때는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한다"던 그녀답게 자신이 벌인 전쟁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처는 잉글랜드 중부 소도시 그랜섬에서 잡화상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근면·검약·시장(市場)의 의미를 13세에 생계 때문에 학업을 그만둔 부친으로부터 일찍이 배웠다. 옥스퍼드대 화학과를 장학금을 받아 졸업했지만 정치에 뜻을 품었다. 열살 때 지방의회에서 선거 때 심부름을 했는데 "후보가 말을 붙일 때 짜릿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플라스틱 제조 공장, 식품 공장 연구원 등으로 일하다 195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낙선한 뒤 기업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해 1953년 남녀 쌍둥이를 낳았고 남편의 후원으로 이듬해 법정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34세에 하원에 진출해 1970~74년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75년 영국 첫 여성 보수당 대표, 1979년 영국 첫 여성 총리가 됐다. 보수당 내 반대 세력에 밀려 퇴임하기까지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최장 기간인 11년반 동안 머물렀다.

    총리 취임 후 첫 전쟁 상대는 '영국병'이었다.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뒤에도 고(高)실업률, 저(低)성장, 인플레이션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권력화한 노조가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

    대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도덕적 보수 이념에 기반한 '대처주의(Thatcherism)'로 영국병을 치유해갔다. '소득 내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어릴 적 받은 가르침대로 케인스식 자본주의를 비판해 '국가는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써서는 안 된다'는 '작은 정부론(論)'으로 일관했다.

    전국광부노조가 1984년부터 1년간 총파업을 벌였지만 '협상은 협잡과 같은 말'이라며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단원들이 1981년 옥중 단식 투쟁을 벌여 10명이 아사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타협 없이 냉혹하게 대처해 승리했다.

    대처는 영국에서 1만3000㎞ 떨어진 포클랜드 영유권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1982년 봄 11주 동안 벌인 전쟁에서 승리해 용기·결단력·애국심으로 무장한 '전사 여왕(warrior Queen)'의 신화를 낳았다. 매기(애칭)는 아군 전사자 가족 255명에게 일일이 자필 위로 편지를 보내 감동을 줬다. 당시 희소한 여성 정치인을 바라보는 대중의 경계심을 더욱 진한 여성성·모성으로 정면 돌파한 것이다.

    대처는 "우리의 목표는 노동당이 퍼뜨린 사회주의의 허상을 폭로·격파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철의 여인(Iron Lady)'은 집권 3년 전인 1976년 소련의 한 신문이 대처에게 붙여준 별명이지만 훗날 이 철녀(鐵女)는 국내 사회주의 세력뿐 아니라 전 세계 사회주의를 혁파했다는 평을 받는다. 토니 블레어(노동당) 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보수당) 총리 등 정치인들은 당적을 불문하고 대처리즘의 영향을 받은 '대처의 아이들'임을 자랑으로 여긴다.

    대처는 국민에게 극단적 애증의 대상이다. 일 중독증과 남을 믿지 못하는 천성 때문에 열 살 연상의 남편만이 일생의 유일한 친구였고, '이 길밖에 없다'식의 독단 탓에 '티나(TINA·There Is No Alternative)' '얼굴에 페인트칠을 한 스크루지 여사' '아이들 우유 날치기'(1971년 초등학생 우유 무상 급식 중단 정책) '인종주의자'(1978년 관대한 이민법 반대)란 악담을 들었다.

    마거릿 대처(왼쪽) 당시 영국 총리가 1984년 12월 미 메릴랜드 주(州) 캠프 데이비드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운전하는 전동차를 타고 웃고 있다. /AP
    대처는 인기를 의식해 할 말을 삼가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을 직접 처리하기에 앞서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엄정한 눈높이의 그녀를 서민이 더 증오했다. 자신보다 생일이 6개월 늦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도 냉랭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권운동가들과도 거리를 뒀다.

    대처는 집권 기간을 늘릴수록 아집을 더했다. 노조·반군·외국군을 모두 무릎 꿇렸던 무적의 여인도 소속 당 의원들이 벌인 불신임 비밀투표로 재임 중 물러나야 했다.

    대처는 2002년 뇌졸중을 겪고 다음 해 남편이 췌장암으로 떠난 뒤 치매로 투병해 왔다. 대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철의 여인'은 치매에 걸린 대처의 모습을 묘사해 '노동당의 비열한 복수극'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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