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퐁네프'서 번뜩였던 그 연기, 라방… 아홉가지 인생 변신 모두 강렬했다

조선일보
  • 변희원 기자
    입력 2013.04.04 03:05

    홀리 모터스

    알렉스(드니 라방)가 이마를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기듯 문지르는 '퐁네프의 연인들'의 첫 장면부터 레오 카락스(53) 감독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열광하거나 혐오하거나. 카락스 감독이 13년 만에 내놓은 '홀리 모터스(Holy Motors)'도 관객 반응은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난 1년간 본 영화 중 '홀리 모터스'가 가장 흥미롭고 자극적이라는 것을.

    기승전결을 갖춘 줄거리랄 게 없는 이 영화는 비현실적·비논리적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백발의 오스카(드니 라방)가 가족의 다정한 배웅을 받으며 흰색 리무진에 오른다. 차 안에서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경제문제를 논하는 그는 금융계 종사자로 보인다.

    ‘홀리 모터스’중 오스카(맨 앞)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장면. /영화사 오드 제공
    하지만 곧 가발을 쓰고 분장하더니 구부정한 할머니로 차에서 내려 구걸을 한다. 그 뒤로도 부지런히 살인자, 아버지, 광인 등으로 분장을 아홉 번 하고 차에 오르내리길 반복한다. 그가 왜 이런 연기를 하는지, 누가 이런 것을 시켰는지 설명은 없다. 하지만 영화의 이미지와 오스카의 연기는 선명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배역마다 '이게 오스카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기대하게 한다.

    오스카는 인생 그 자체다. 그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모두 연기한다. 그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 역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오스카가 끼니를 때울 시간도 없이 여러 배역을 연기해야 하는 것처럼 인생은 아들이 됐다가, 삼촌도 되고, 누군가의 옛 연인이었다가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영화 제목 '홀리 모터스'의 '모터스'는 오스카가 타고 다니는 리무진을 가리킨다. 배우들이 배정받은 역할을 연기할 수 있도록 그들을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데려다 놓는 리무진 안에는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오스카가 연기로 보여주는 인생의 경험과 감정이란 고통과 고독, 그리움, 후회 등이다. 때론 그 정도가 지나쳐 광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다는 건 아니다. 오스카는 아무리 힘든 배역이라 할지라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배우들의 리무진은 한데 모여 자기가 태웠던 인생을 위로한다. '홀리 모터스'는 언젠가 인생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믿는 영화다.

    '홀리 모터스'의 프롤로그에 카락스 감독 본인이 등장한다. 극장 안에서 돌처럼 굳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고, 한쪽 방 안에선 카락스 감독이 침대에 웅크리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손끝에 달린 열쇠로 벽에 숨어 있던 문을 열고서 객석 사이를 걸어간다. '폴라 X' 이후 13년 만에 '홀리 모터스'를 들고 나타난 그는 쉽게 찍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에 무감각해진 관객들에게 "이게 진짜 인생이고, 진짜 영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가 주는 자극과 흥분은 돌부처가 된 관객들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4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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