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38년 된 장준하 유골을 감식한… 이정빈 교수와의 논쟁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3.04.01 03:11 | 수정 2013.04.01 10:24

    “정밀감식? 사실은 혼자 했다”… ‘장준하 타살’은 한 법의학자 개인 소견일 뿐

    “추락해서 머리와 골반이 동시에 깨졌다면 왜 중간의 어깨뼈는 안 깨졌나”

    “유골 보기 전 ‘타살 가능성’ 말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는 학자적 태도가 아니었다”

    이정빈(67)서울대 명예교수가 “장준하 선생은 머리에 가격을 당해 즉사한 뒤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며 정밀 감식 결과를 발표했을 때, 상당수 언론 매체가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권위 있는 법의학자인 이 교수가 주도하고 정형외과와 방사선과 등의 전문의들이 참여했으며, 컴퓨터 단층촬영과 3D 동영상 등의 첨단 기술이 동원됐다는 보도도 이번 결과의 신뢰도를 더욱 높였다.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구나, 나도 그렇게 믿었다.

    이 교수와의 인터뷰는 “장준하의 죽음에 대해 최종 결론을 낸 것 같다”는 인사말로 시작했다.

    장준하(1918~1975년·광복군 장교, 반독재 운동, ‘사상계’ 창간)는 1975년 8월 17일 지지자들과 함께 산행을 간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489m)에서 숨졌다. 하산 도중 추락했다고 한다. 현장 목격자는 수행했던 K씨(교사) 딱 한 명이었다.

    작년 여름 폭우로 장준하의 묘소를 이장(移葬)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인을 둘러싼 공방이 재연됐다. 두개골에서 지름 6~7㎝ 크기의 골절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대선 국면에서 정치 이슈로 번졌다. 유족 측과 재야 세력이 앞장서 ‘장준하 선생 사인(死因) 진상 조사 공동위원회’를 만들었다.

    ―어떤 인연으로 여기에 참여하게 됐나?

    "작년 8월 묘소 이장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이 신문에 게재됐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문의를 해와 ‘함몰 부위의 테두리가 잔가지처럼 깨진 걸로 봐 망치로 때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직후 SBS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자 유족 측에서 ‘이번에 결판을 내자’며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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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빈 교수는“한때 장준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됐던‘독극물 주입설’은 이번에 아닌 게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이정빈 교수는“한때 장준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됐던‘독극물 주입설’은 이번에 아닌 게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타살’로 믿어온 유족 측으로서는 이 교수가 같은 입장이어서 유골 감식을 맡긴 게 아닌가?

    "그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대선 정국에서 학자로서 정치적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았나?

    "경우에 따라 대선에 미칠 파장이 클 것이다. 나는 그런 판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감식을 하긴 하되 대통령 선거 끝난 뒤에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감식은 대선 전에 벌써 끝났는데 발표를 늦춘 것은 이 때문이다."

    ―감식팀은 어떻게 구성됐나?

    "팀이라고 할 것도 없다. 사실은 혼자서 했다. 작년 여름 유골을 이장할 때 처음 감식한 이윤성 서울대 교수와 둘이서 하려고 했다. 그는 처음엔 할 듯하다가 자신은 빠지겠다고 했다. 대한법의학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도 함께 하자는 공문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대해 이윤성 교수는 “그분은 유골을 보기도 전에 언론에 ‘타살 가능성’을 말했다. 이는 학자적 태도가 아니었다. 후배 법의학자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다. 나는 직접 그분에게 재차 확인했다. 그분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선입견을 갖고 감식을 한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내가 들어가본들 과학적 논의가 안 될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대한법의학회에서도 “그 주관 단체나 이정빈 교수가 특정 결론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아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쨌든 38년이나 된 유골만 있으니 부검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밀 감식’이라면 컴퓨터 단층촬영과 3D 동영상 등을 활용한 것을 말하나?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X레이로 전체 유골 사진을 찍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감식에는 별다른 공정이 없다. 1975년 사망 당시의 검안 사진들과 내 눈으로 유골을 보면서 정리가 됐다."

    ―통상 유골 검안과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셈이다. 골절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유골에 나타나 있는 주요 골절은?

    "우측 머리(오른쪽 귀 뒷부분)에 지름 6~7㎝ 크기의 함몰이 있었고, 또 오른쪽 골반뼈가 깨져있었다."

    ―일단 쟁점을 정리하자. 골반뼈가 부러질 정도라면 ‘추락’은 있었다고 볼 수 있나? 실족이든 강제로 떠밀렸든 간에 말이다.

    "사람이 가격하는 힘으로는 그런 손상을 입힐 수 없다. 골반뼈가 깨졌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추락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사망의 직접 원인은 머리 골절이 맞는가?

    "그렇다. 한때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됐던 ‘독극물 주입설’은 이번에 아닌 게 분명해졌다."

    ―골절이 어떻게 생겼느냐가 관건이다.

    "거기서 갈린다."

    ―감식 결과를 발표하면서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이장 과정에서 유골을 검안한 이윤성 서울대 교수는 “이는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혀 생긴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는 게 법의학자의 자세가 아닐까?

    "임상 의사라면 그렇게 해야 할지 몰라도, 법의학자는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재구성을 해야 한다. 그냥 ‘칼로 찔렀다’는 사실에 그치는 게 아니고, 어떤 칼로 어떻게 찔렀는지를 그려내야 한다."

    ―하지만 과학적 근거를 갖고 추정해야 하지 않나? 처음에는 “망치로 가격했을 것”이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큰 돌이나 아령”으로 바꿨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망치’라고 했다. 유골을 직접 안 보고서 말한 거라 좀 찜찜했다. 실제로 보니 함몰된 모습이 달랐다. 훨씬 더 큰 힘이 작용했다. 그래서 ‘큰 돌이나 아령’으로 바꿨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추락해서 우측 머리와 엉덩이가 동시에 깨졌다면, 왜 그 중간에 튀어나와 있는 어깨뼈는 안 깨졌을까. 이게 포인트다."

    ―그게 추락 전 머리를 가격당했다는 논리적 근거인가?

    "양쪽 골절이 있었다면 그 중간의 어깨뼈도 깨졌어야 한다. 그런데 왜 어깨뼈는 안 깨졌느냐? 이는 머리와 엉덩이가 동시에 깨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추락 전에 머리를 먼저 가격당했고, 나중에 떨어져서 엉덩이가 깨졌던 것이다."

    ―머리와 골반뼈가 깨지면 반드시 어깨뼈가 부러져야 하나?

    "반드시는 아니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이는 지형 조건에 따라, 또 어떻게 떨어졌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당시 장준하는 배낭도 메고 있었다)

    "추락해서 머리와 엉덩이가 깨졌는데 중간에 있는 어깨뼈가 다치지 않은 사례를 제시해보라. 그러면 인정하겠다."

    이 대목에서 말문이 막혔다. 나중에 몇몇 법의학자에게 자문하니 “인체로 추락 실험을 해볼 수는 없다. 다만 지금까지 있었던 추락사를 보면 그 지형 조건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건 가능하고 저건 불가능하다는 단정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발표에서 “오른쪽 머리를 다친 장 선생의 유골에서 왼쪽 안구(眼球) 주위의 뼈가 깨끗한 점을 봐도 추락사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했다.

    "추락처럼 큰 힘을 받는 경우에는 반대편으로 충격이 전해져 손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대편에 손상이 있었다면 추락사가 확실하나, 추락사라고 해서 반대편 손상이 꼭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법의학적 상식이다.

    "추락 강도가 약하면 반대편 손상이 안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장 선생의 머리에는 골절 선이 3개나 보인다. 75도 각도에 14.7m의 낭떠러지였다. 여기서 추락해 머리가 깨졌다면 반대편 손상이 안 일어날 수가 없다.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절벽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현장이다."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K씨도 세월이 흘러 정확한 추락 지점을 찾지 못했는데.

    "작년에 ‘장준하 암살 의혹 규명 대책위원회’에서 여기라고 찍어줬으니까, 나는 그런 걸로 아는 거지. 당시 내가 본 것도 아니고."

    ―계곡물이 흐르는 암반이 추락 지점이 맞을까? K씨는 1993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당시 고운 모래로 덮여있었다”고 기억했다.

    "… 모래라? 모래가 있었을 것이다. 사망 당시의 검안 사진을 보면 주삿바늘 자국 같은 게 있어 ‘독극물 주입설’이 나왔는데, 나는 그걸 모래가 박힌 걸로 봤으니까."

    ―이번 발표에서 “시신에 출혈이 거의 없는 것도 타살 가능성”이라고 주장했다.

    "사망 당시 사진을 보면 별로 출혈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머리에 입은 가격으로 즉사해 혈액 순환이 멈춰, 이후 추락으로 입은 다른 신체 부위에서는 출혈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사망 당시 현장에 갔던 당직 검사는 한 인터뷰에서 “시신은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피가 꽤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머리에만 출혈이 심하고, 다른 신체 부위에서는 출혈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바깥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근육이나 장기가 파열되면서 생기는 내부 출혈도 있지 않은가?

    "팔꿈치에 심하게 상처가 났는데 옷 바깥으로 출혈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머리 가격으로 추락 순간에 이미 심장이 멎어 혈액 순환이 멈췄다는 뜻이다."

    ―머리를 세게 맞아도 즉사하지 않는다는 게 의학적 상식이다.

    "예외적으로 즉사할 수도 있다."

    ―목격자 K씨도 “장준하 선생은 추락한 뒤 잠시 숨이 붙어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 말을 믿지 않는다."

    ―장준하 선생은 1974년 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수감됐다가 그해 말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로 형집행정지돼 풀려나 입원했다. 산행을 간 것은 8개월 뒤였다. 여전히 산 정상에서 누군가에 의해 머리를 가격당한 뒤 절벽으로 떠밀렸다는 것을 확신하나?

    "어디서 때렸는지 어떻게 알겠나. 그건 특정할 수 없다. 다만 떨어지기 전에 가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미 그 근거는 충분히 말했다."

    ―당시 상황이나 현장 등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법의학자로서 유골만 볼 뿐이다. 다른 것은 내 범위를 넘어선다."

    ―문제는 한 법의학자의 개인 소견이 ‘장준하 죽음은 타살’이라고 결론을 낸 것처럼 됐다는 데 있다.

    "글쎄…, 정치적으로 예민한 이 사안을 맡을 때 나름대로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는 대한법의학회 회장과 대검찰청 과학수사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여대생 박상은양 피살 사건(1981년), 연세대 이한열군 사망 사건(1987년), 인기 그룹 듀스 멤버 김성재씨 사망 사건(1995년), 만삭 의사 부인 사망 사건(2011년) 등에서 부검을 맡았다.

    한편, 대한법의학회는 학회 차원에서 장준하 유골에 대한 감정을 한 뒤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정해, 혹은 잘못된 판단에 근거해 사실을 오도할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현재의 자료들만으로는 추락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 그러나 두개골 골절 손상은 추락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가격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도 적극 배제할 수는 없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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