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정치부 차장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집무실 책상엔 당일 발간된 한국의 중앙 일간지가 매일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PDF 판을 인쇄한 것인지, 비밀스러운 경로로 실제 신문을 입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한국의 언론 보도에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우리 정보 당국은 파악했다.

그의 아들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도 아버지 못지않게 한국의 언론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신문사의 외교안보팀장으로 이렇게 추론할 만한 생생한 사례를 경험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25일자 2면에 '군(軍), 제2천안함 땐 김일성 부자 동상 정밀 타격'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국방부 출입기자 두 명이 취재한 특종기사였다. 북한이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등의 고강도(高强度) 국지 도발을 일으키면 북한의 김일성 부자(父子) 동상을 파괴한다는 우리 군의 전략을 보도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이 즉각 반응해왔다. 천안함 폭침(爆沈) 3주기인 26일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이름도 생소한 '1호 전투 근무 태세'를 발령했다. '남한 괴뢰 당국자들'이 "대원수님들의 동상을 미싸일로 정밀 타격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최종 결심을 내외에 천명한다"고 했다. 이어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의 성명이 나왔다. "'괴뢰' 조선일보 3월 25일부에 의하면"이라는 표현을 써 가며 "우리의 최고 존엄을 감히 건드린 자들은 더는 살아 숨 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막말 논평을 했다.

산 사람을 사살(射殺)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김일성 부자 동상을 파괴한다는 계획에 왜 이렇게 북한이 흥분하는지를 이해하긴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가 특정 언론에 난 보도도 소홀히 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언론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기사만 보고, 한국 사회의 대북관(對北觀) 변화와 관련된 보도는 무시하거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지난달 3차 핵실험 전만 해도 한국의 언론에서 '북한 김씨 정권 붕괴'를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禁忌)였다. 북한이 긴장 수위를 계속 높이자 이젠 "북한을 비핵화시키는 것보다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더 쉽다"는 발언들이 기탄없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중앙 일간지의 한 논설위원이 쓴 칼럼 제목은 "'북 정권 교체'보다 나은 대안 있나"였다. 조선일보에도 "중국 내에서 '북한을 버리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 자체가 변화 조짐"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칼럼도 실렸다. 천안함 폭침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던 민주당이 북한의 책임을 지적한 것도 기사화됐다.

김정은이 정말로 한국 언론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북한의 도발이 계속될수록 한국의 여론이 비판적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젠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 국민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는 것도 유의해서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