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의 글씨는 ‘궁체(宮體)의 완성’이고, 명성황후의 글씨에는 여장부다운 강인한 기질이 들어있다.”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공주·궁녀와 사대부, 일반 백성이 쓴 한글 편지(언간·言簡) 400여 건이 집대성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연구소(소장 황문환)는 여러 자료에 단편적으로 소개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던 한글 편지 중 대표적인 글씨를 모아 ‘조선시대 한글편지 서체 자전(字典)’을 27일 펴냈다.
자전 편찬에는 서체학·문자학·국어국문학·서예 등 분야별 전문가 31명이 참여했으며, 5년 동안 조선시대 한글 편지 1500여건을 분석해 87명의 한글 편지 400여 건을 담았다. 모두 3700행, 4200여 어절, 3만2000여 글자를 수록했다.
◇거침없는 효종, 굳건했던 정조
왕의 친필 편지 중 남아 있는 것은 선조, 효종, 현종, 숙종, 정조의 글이다. 이중 가장 명필은 단연 선조였는데, 중국 사신들이 그 필적을 얻고자 애를 쓸 정도였다고 한다. 해서체로 또박또박 쓴 글씨는 한글을 한문 필체로 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모두 자신의 딸인 옹주에게 보낸 것으로 자녀에 대한 자상함이 배어 있다.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은 거침없고 시원한 필체를 통해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품을 보여주며, 현종의 글씨에선 아기자기함과 다정다감함을 느낄 수 있다. 숙종의 편지는 획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쓴 단정함과 올곧음을, 정조의 글씨에서는 힘차고 굳은 세로획의 필체에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했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흘림체 달인' 정순왕후, '궁극 개성파' 명성황후
장렬왕후(인조 계비), 인선왕후(효종 비), 명성왕후(현종 비)는 모두 뛰어난 달필의 소유자였다. 사대부 집안 남성의 필체와 닮아 한문 서체를 한글로 구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인현왕후(숙종 비)의 글씨는 글자의 중심축이 한문 서체와는 달리 ‘ㅣ’ ‘ㅏ’‘ㅓ’ 등의 세로획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맞춰져 있어 ‘궁체의 완성’으로 평가된다. 정순왕후(영조 비)의 글씨는 달필의 흘림체다.
명성황후(고종 황후)는 친필 한글 편지만 140여 편이 남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측은 “궁체도 아니고 한문 서체도 아닌 그야말로 개성적인 서체”라고 말했다. 줄이 인쇄된 시전지(시나 편지 등을 쓰는 종이)에 쓴 편지조차 세로줄이 똑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줄을 맞추는 것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흘림체로 거침없이 이어 쓴 필체다. 이 개성적인 필체에서는 자신만의 굳은 신념과 정신으로 일국을 좌지우지하던 기질이 유감없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녀리고 고운 공주의 글씨
공주의 한글 편지는 의외로 단 1편만 전한다. 효종의 차녀인 숙명공주의 편지인데, 그것도 효종이 먼저 받은 편지의 여백에 답장을 썼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단아하고 깔끔한 자형, 가녀린 획의 모습이 갓 결혼한 공주의 고운 모습과 예쁜 성품을 보여 주는 듯하다는 설명이다.
황문환 소장은 “이 자전에 실린 글씨들은 서체적 조형미가 뛰어나 한글 서예작품은 물론 컴퓨터 폰트 개발, 패션 산업으로까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