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만들면 外製에 지고… 잘 만들면 '흡연 권장' 야단"

    입력 : 2013.03.26 03:05 | 수정 : 2013.03.26 09:13

    [이 디자이너의 딜레마] KT&G 디자인부
    '잘 팔리게'가 디자인 의무인데 규제산업 '담배'는 오히려 반대
    너무 예쁘면 '商術'로 비난받아…
    '국산' 지키려 노력하는 우리들, 비난받을 땐 사실 서글프죠
    앞으론 유해성 더 '세게' 알려야… 흉측해도 멋지게 만들어볼게요

    "마냥 예쁘게 만들 수도, 그렇다고 일부러 덜 예쁘게 할 수도 없고…. 아마 우리 같은 고민을 하는 디자이너도 없을 겁니다(웃음)."

    현대 산업 디자이너의 제1숙명은 '많이 팔리도록 디자인하는 것'일 것이다. 오죽하면 "디자인은 말 없는 세일즈맨"(미국의 전설적 그래픽 디자이너 티보 칼맨)이라는 말도 나왔을까.

    그런데 이런 숙명 속에서 '너무 잘 팔리게 디자인하면 안 되는' 희한한 운명의 디자이너들이 있다. 국내 담배 패키지를 만드는 KT&G 디자인부 소속 디자이너 10명이다.

    서울 대치동 KT&G 사옥 회의실에서 이 회사 디자인팀원들이 담뱃갑을 앞에 두고 웃고 있다. 이들은 “우리만큼 고민 많은 디자이너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명원 기자
    최근 서울 강남구 대치동 KT&G 사옥에서 만난 이들의 고민을 들어봤다. 조창희 디자인부 과장은 "디자인을 너무 잘 하면 '담배 많이 팔려는 상술(商術) 아니냐'는 비난을 듣고, 그렇다고 영 신경을 쓰지 않으면 소비자들 외면을 받는 게 우리들의 딜레마"라고 했다. "담배가 규제산업이다 보니 안 좋게 보는 시각들이 있죠. 전 사회적인 금연 열풍에, 담뱃값 인상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우리 입장도 참 난감합니다."

    사실 국내 담뱃갑 디자인은 최초의 국산 담배인 '승리'(1945년)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런 종이에 반공(反共) 등 국가적 구호를 박아넣었던 것(1951년 '건설', 1966년 '새마을' 등)이, 1988년 담배시장 개방으로 본격적인 변화를 맞이한 것. 흰색, 검은색 등 무채색을 중심으로 한 깔끔하고 세련된 로고·캐릭터 등이 주종을 이뤘다. '국산 담배=촌스러운 담배'라는 인식을 깨고 소비자층을 넓혀 안정적인 시장 점유율(70%)을 지키고 있는 것도 이런 디자인 덕분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런 가운데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라는 담배 이름까지 나와 "예쁜 디자인도 모자라 담배가 '존재의 이유'라니, 말이 되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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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그 담뱃갑 기억나세요? KT&G에서 출시된 담뱃갑들. 위 왼쪽부터 승리(1945년 출시), 화랑(1949년), 금관(1961년), 아래 왼쪽부터 새마을(1966년), 태양(1974년), 거북선(1974년).
    이에 대해 디자이너들은 "좀 서글프다"고 했다. "우리로선 글로벌 기업에 맞서 국내 시장을 당당히 방어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디자인에 조금만 소홀해도 '식상하다'며 금방 외국 제품으로 갈아타기 쉽거든요. 그건 국부 유출 아닙니까? 특히 국내 소비자들이 유행에 민감해 지속적으로 디자인을 자주 개발해야 해요."

    사내 디자인팀이나 외주업체가 1~2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통상적인 패키지 개선 작업 외에, 1년에 2~3차례씩 유명 인사들을 섭외해 디자인을 맡기는 단발적인 협업(collaboration) 작업이 활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패션잡지, 나전칠기 장인, 패션 디자이너, 영화감독 등이 참여하는 이 한정판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외관 때문에 그야말로 '완판(전부 매진)'된다고.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법. 현재 국회에선 전체 담뱃갑 표면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경고문구를 향후 50%까지 올리고, 담배의 유해성을 알리는 끔찍한 사진을 넣도록 하는 안(案)이 추진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담뱃갑이 어느 정도 '흉측'해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일 듯싶다. KT&G의 한 디자이너는 "그렇게 되면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영국 디자인뮤지엄은 호주 정부의 '경고그림' 담배 패키지를 '2013 올해의 디자인' 그래픽 부문 우수작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아무리 끔찍한 그림이라도 KT&G 디자이너들의 '더 멋있게' 디자인해야 하는 운명은 계속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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