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의 태평로] 김미경을 위한 변명

    입력 : 2013.03.23 03:02 | 수정 : 2013.03.23 03:58

    박은주 문화부장

    90년대 말 야간대학원에 다녔다. 기말고사 때, 시험감독 조교가 자리를 비우자 몇몇이 책을 꺼내 놓고 답을 썼다. 가장 먼저 책을 꺼낸 것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운동권 인사였다. 도덕성을 '남을 치는 칼'로만 사용하는 운동권을 여럿 보아온 터였지만, 대놓고 뻔뻔한 현장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4학기가 되자, 논문 얘기들을 했다. "무엇부터 베껴야 할지 모르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얘기가 오갔다. 공부 체질이 아니었고, 대충 학위 받아 학교를 기웃거리게 될까 봐 논문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덕성이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때 논문을 썼다면, '석사학위로 노벨상 받을 거냐, 대충 베껴'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이다. 큰 거 피했다.

    "얼마나 힘드냐, 청춘들아. 너희는 억울해." 이런 식의 가짜 위로서가 범람하는 시대, 다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나왔다. "징징거리지 마라. 난 더 힘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대체 넌 뭘 했는데?" 따져 묻는 배짱 좋은 여성, 강사 김미경씨였다. 며칠 전, 본지는 그가 야간대학원에 다니면서 쓴 논문에서 여러 군데 표절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 그는 공식 입장을 냈다. "학계의 기준에 맞추지 못한 것은 실수였지만 양심까지 함부로 팔지는 않았다"고 했다. 입장문을 요약하면, '실수는 있었지만 의도는 없었다. 조선일보 보도는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일부만 본 것'이라는 내용이다. 평소의 화통한 어법에 비하면, 옹색해 보인다. 그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했겠지만, 김미경다운 해명은 아니었다. 평소 당당하게 '출세한 촌년'이라 자신을 호칭했듯, '촌년이 욕심을 부렸다. 죄송하다' 화끈하게 말하는 편이 낫지 않았나 싶다.

    김씨의 표절 논란을 두고, 그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얘기가 나왔다. 한 선배는 '학위가 지금 위치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었다면 사임해야 하고, 아니라면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기자도 김씨가 한 번 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신정아 사건이 터지고서야, 우리 사회는 가짜 학력을 말하고 이력서에 쓰는 것이 '범죄'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됐다. '남의 논문을 일부라도 베끼는 일은 큰 범죄'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생긴 것도 최근 몇년 사이 일이다.

    지금은 김미경이라는 유명인에게 시선이 집중돼 있지만, 김미경보다 덜 유명하면서 김미경보다 뻔뻔하게 학위를 따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적어도 김미경씨는 자기 노력으로 지금의 명성을 얻었다.

    '차고 널린 게 박사'라 시큰둥하면서도 '어디 박사'라고 하면 그의 말에 괜한 무게를 싣는 게 우리였다.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환자를 아무리 잘 본 의사라도 박사 학위가 있어야 대학병원 교수가 된다. 의미 없는 논문이라도 편수를 채워야 정년이 보장된다. '질적 검증'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대학이나 기관은 자의(恣意)적 채용의 방패막이로 논문 편수와 학위 증명서를 이용해 왔다. 학교는 특수대학원을 마구 세워 석·박사 학위 장사로 돈을 벌고, 그 박사 실업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으로 다시 뒷돈을 챙긴다. 두 번 돈 버는 시장이다.

    가짜 논문을 쓰는 건 부도덕하다. 하지만 비빌 언덕이 있으니 자꾸 생기는 거다. 도덕성 재무장으로는 부족하다. 학위 논문 표절이 나오면 그걸 쓴 사람뿐 아니라 그런 논문에 도장을 찍은 사람을 공개하고 학교에도 페널티를 줘야 한다. 그래야 학위 남발의 수요·공급 사이클이 끊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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