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비사
융이 지음|류방승 옮김|RHK|304쪽|1만4000원
역사 속 화폐 전쟁에서는 금(金)이 은(銀)을 눌렀다. 은은 금보다 매장량이 적어 희소성이 높지만 수요량은 금이 많다. 금값이 더 나간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은값 상승률은 600%를 넘었고 조짐이 수상하다. 은은 금에 비해 산업 분야에서도 활용도가 높다. '뛰는 금 위에 나는 은' '금도끼 팔고 은도끼 사라'는 말까지 나온다. 은에 대한 재평가다.
이 책(원제 'Secret of Silver')은 그 은을 렌즈 삼아 역사를 들여다본다. 제목 그대로 비사(秘史)에 가깝다. 중국 경제경영 전문가인 저자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이야기 궤짝을 연다. 은의 제국이었던 중국은 왜 산업혁명의 특급열차에 올라타지 못했을까? 세계 최초로 지폐를 사용할 만큼 선진적이었던 중국 금융제도는 왜 쇠퇴했을까? 이른바 '은의 저주'는 실제 존재했을까?
◇은은 역사의 산증인
명나라는 1375년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라는 지폐를 발행하고 금과 은을 화폐로 쓰지 말도록 하는 금은령(禁銀令)을 내렸다. 지폐 발행은 고도로 발달한 상품 경제와 부족한 귀금속 자원, 두 뿌리에서 나왔다. 화폐 공급량이 왕성한 경제를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성은 상태에 따라 가치가 출렁거리는 지폐를 인정하지 않았고 은을 계속 거래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탈리아 반도에 모인 금과 은이 배를 타고 동양으로 가 향료, 비단과 교환됐다. "금과 은에 대한 유럽의 갈망이 대항해 시대와 신대륙 발견을 낳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명나라는 은 기근을 해소하려는 국제무역이 잇달아 실패하고 자금성이 불타자 서양 원정을 중단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쇄국을 선택했다.
유럽은 신대륙을 정복하면서 금과 은을 약탈했다. 특히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달의 눈물'이라 불렀던 은을 300년간 1억㎏이나 캐 실어날랐다. 이로써 유럽의 은 기근은 사라지고 글로벌 무역 시대가 열렸다. 중국은 찻잎, 비단, 도자기를 수출하며 은만 요구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은의 종착지는 사실상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온 은은 나갈 줄을 몰랐다. 비상시를 대비해 은을 땅속에 묻어두는 풍속 때문이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대로 순도가 떨어지는 은화나 동전만 유통됐다. 한편 스페인 경제는 식민지에서 약탈한 은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며 벼랑 끝으로 몰렸다. 스페인과 중국은 막대한 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산업혁명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은의 저주'다.
◇다시 은을 주목한다
은을 쌓아놓기만 한 청나라의 행동은 아편전쟁의 빌미가 됐다. 식민 패권주의를 지키려 했던 영국을 필두로 서방에는 금본위제가 시행된다. 19세기 들어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낮은 등급의 금광석에서 금을 추출하는 방법이 발명되자 은은 화폐 역사에서 퇴장할 운명을 맞는다.
이 책에는 명나라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은의 역사가 정리되어 있다. 1900년 프랭크 바움이 발표한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두고 "은의 화폐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당시 미국 서민들의 소망을 담았다"고 해석한 대목이 흥미롭다. 도로시는 은 구두를 선물로 받았고 노란 벽돌 길은 금본위제를 암시하며 오즈(Oz)는 금은의 중량 단위인 온스의 약칭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로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은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수요가 늘면 값이 오르고 값이 오르면 싸우게 된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 세계를 한 핏줄로 이어줬던 은은 다시 화폐의 역할을 맡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흐름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편집이 아쉽지만 쉽고 명쾌한 책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했던 은의 드라마틱한 고백으로도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