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한 얼굴의 말수 적은 경호원을 맡았을 때('모래시계')나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고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농담을 지껄였을 때('태양은 없다')나, 이정재(40)는 언제나 청춘의 표상(表象)이었다. 하지만 '만인의 청춘'에게도 세월은 똑같이 흘렀다. 그는 올해 데뷔 20년을 맞는다. 어느덧 '중견배우'가 된 이정재는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1일 개봉)에서 기업형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경찰 이자성을 연기했다. 범죄조직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동시에, 자신을 쉽게 받아주지 않는 경찰조직을 원망하며 갈등하는 캐릭터다.
15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는 "20년 전이 그렇게 오래전 일 같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눈이 다 감기도록. 그에게는 청춘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이번 영화에서 아주 불쌍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자기 자신이 없는 인생을 사는 남자다. 요즘 직장인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봉급을 위해 자신과 맞지 않는 직장을 다니고, 언젠가는 원하는 일을 하려고 벼르지만 기회는 오지 않고. 원치 않은 직장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그만두기 어렵게 된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최민식과 황정민이 각각 연기한 경찰 '강과장'과 조폭 '정청'보다 모호한 캐릭터다.
"내가 맡은 역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강과장'은 상관이니까 그에겐 화가 나도 감정을 다 쏟아내지 못하고, 조폭 '정청'하고 있을 때는 신분이 탄로날까 봐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걸 또 억눌러야 한다. 감정을 숨겨야 하는 역할이라 조금 어려웠다."
―스트레스를 꽤 받았나 보다.
"영화 '도둑들'에서 연기한 '뽀빠이'는 할 게 많았다, 장난도 많이 치고, 콧수염도 붙이고. 하지만 자성은 뭘해도 이게 어울리는 건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조금 더 표현하면 오버한 것 같고 조금 덜하면 밋밋한 것 같았다. 담배를 끊었었는데, 촬영장에 있는 소품용 담배를 막 피워대기 시작했다. 영화 끝나면서 담배도 끊었다."
―곽경택 감독의 '태풍'(2005) 이후 공백기가 있었고, 3년 만에 출연한 영화 '1724 기방난동사건'(2008)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계속 주목받고 살겠나. 선택을 잘못한 적도 있었고, 일을 등한시 하기도 했다. 자주 나오질 않으니 출연하는 작품마다 다 흥행이 되거나 평가가 좋아야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요즘 작품 수를 좀 늘리니까 몸이 피곤하긴 해도 마음은 편해졌다."
―'신세계' '하녀' 등 영화마다 언제나 멋진 차림이다. 영화들이 당신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 답답하지 않나.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긴 걸 어떡하나. 내가 순박한 시골 사람 역할을 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그러니 '너는 내 운명'은 정민이 형(황정민)에게 가고 나한테는 '하녀' 같은 영화가 오는 거다. 예전에는 답답한 마음에 역할을 많이 골랐다. 나도 '저런 역할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에 순박한 시골 농부나 터프한 마초처럼 내가 해보지 않았거나 내 이미지와 다른 역할만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출연하는 작품 수가 계속 줄어들고, 관객과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지금은 '생긴 걸 받아들이자'는 생각이다. 내 신체 조건, 외모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내면이 있으니까. 똑같이 수트를 입고 나와도 다른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
―데뷔 이후 20년이 흘렀다.
"그간 일들도 많았고 경험도 쌓았다(말을 잠깐 멈추더니). 배우는 참 매력적인 직업이다. 영화를 한 편씩 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까. 나에게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즐겁게 살 수 있을까'가 큰 관심이다. 사실 그게 인생의 전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