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메스를 잡았던 외과의사가 이제 붓을 들고 환자들 마음 치유에 나선다. 국립암센터원장, 국립중앙의료원장 등을 지낸 박재갑(65) 서울대 의대 교수가 서울대학교 암병원 1~2층 복도에 문을 여는 '갤러리 힐링(Healing)' 개관전으로 그림 14점, 사진 14점을 걸고 첫 개인전을 여는 것. 전시는 다음 달 5일 시작해 5월 21일까지 이어진다. '상생(相生)'이라 이름 붙인 이 전시 출품작의 주제는 대부분 꽃, 나무, 벌, 열매 등 '자연'이다.

"신(神)이 만들어낸 자연의 섭리에서 환자들이 희망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그들 마음에 행복을 심어주고 싶었죠."

박재갑 교수가 21일 자신의 작품이 걸릴 서울대학교 암병원 2층 복도에서 전시회 포스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포스터에 인쇄된 이미지 28점 중 앞쪽 14점은 사진이고, 나머지는 그림이다.

그래서 전시작들은 모두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난가을 경기도 용뫼산을 찾은 그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 열매가 매달려 있는 꽃아그배나무 잎사귀가 첼로를 닮았다 생각했다. "나뭇잎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사진을 찍었죠. 그리고 그것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빨강, 파랑, 갈색이 화음(和音)을 이루는 이 작품의 제목은 '온화(溫和)'. 꽃아그배나무의 꽃말이다. 2010년 자택 근처인 우면산에서 발견한 해바라기와 벌도 화폭에 담았다. 커다란 해바라기 옆을 스쳐 날아가 다른 해바라기로 향하는 벌을 그린 그림 제목은 '상생(相生)'. 이번 전시 제목은 이 작품 제목을 따서 붙인 것이다. "벌이 해바라기를 씨앗 맺게 하고, 해바라기는 벌에게 꿀을 주죠. 사람들 역시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박 교수가 그림을 배운 것은 국립의료원장직에서 물러난 2011년 여름. "워낙 바쁘게 살던 내가 무료해서 견디지 못할까 아내가 걱정했죠. 내게 '당신 애들 어릴 때 학교 숙제 도와주는 거 보니 그림 솜씨 있더라'며 그림을 배우라고 했어요." 홍익대 미술디자인교육원에 등록해 매주 목요일 저녁 그림을 배웠고, 작년 11월엔 교육원 동료들과 함께 그룹전도 했다. 그림을 본 이두식 홍대 미대 교수가 "실핏줄 하나도 신경 쓰는 외과의사답게 그림이 굉장히 치밀하다"며 격려한 덕에 용기를 내 개인전을 하게 됐다. "그림과 함께 전시한 사진들은 2005년부터 찍어온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그림들은 모두 원하는 곳에 기증할 계획입니다."

대장암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그는 지금까지 7000여명의 환자를 수술했다. 환자를 잃어 마음 아플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귀한 생명을 살린다는 기쁨이 더 컸다. "'배 곯지 않으려면 기술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의사가 됐죠. 엉겁결에 갖게 된 직업이 제게 크나큰 보람을 줬습니다. 제가 일하며 느낀 기쁨의 에너지를 이젠 그림을 통해 남들과 나누고 싶어요." 오는 8월 정년퇴임 후 국립암센터 스태프로 옮기는 박 교수는 "앞으로도 생명과 희망을 주제로 꾸준히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