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유통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백화점 매장에 나와 정기세일을 거치고, 연말세일과 각종 행사, 해를 넘겨 진행하는 이월상품전, 초특가상품전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큰 종이 박스에 담겨 킬로그램(㎏)당 얼마씩 소위 '땡처리' 업자에게 넘어가던 관행에 변화가 오고 있다.

요즘 백화점 의류매장 담당자들은 각종 상품전 행사를 열 때면 "옷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불황에 백화점마다 매출이 줄고 물건이 안 팔린다고 아우성인데, 팔 물건이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 이는 최근 들어 의류 브랜드들이 과거에 비해 옷을 많이 만들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작년 8월 서울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에서 겨울상품 특집 판매 행사를 열고 있다

의류업체들은 재고부담을 덜기 위해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었다. 이는 날씨와 경기 부진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서 벌어진 일이다. 한 의류업체 관계자는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봄 가을은 짧아지면서, 봄 가을 옷을 대량으로 생산했다가 손실을 본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라며 "팔리지 않은 옷은 고스란히 창고에 쌓여 재고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했다. 박찬욱 롯데백화점 영캐주얼MD팀 과장은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6개월 전에 제품을 기획해 대량으로 생산했지만, 요즘은 판매 한 달 전에야 제품 생산에 들어가는 제품의 비중이 80%까지 올라왔다"며 "생산 기간이 한 달로 줄어들게 돼 생산량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류업체들은 "옛날처럼 뜰 것 같은 제품을 미리 많이 만드는 것은 너무 위험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패션 업체들은 소위 '소비자 반응 생산'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는 처음에는 다양한 품종을 조금씩 만들어 소비자 반응을 본 후 잘 팔리는 것만 집중적으로 찍어서 시장에 내보내는 방식이다.

'큰 유행'을 의미하는 소위 메가트렌드가 사라진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코오롱FnC 양문영 팀장은 "요즘은 미니스커트와 롱스커트, 밀리터리룩과 미니멀이 함께 유행하는 등 자기 스타일대로 옷을 입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며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패션 시장이 대기업 위주로 재편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의 하나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최근 SK네트웍스의 오브제 인수, 현대백화점의 한섬 인수 등 대기업이 M&A를 통해 브랜드를 늘리고 있다"며 "대기업 계열 브랜드들은 제품 소진율을 높여서 이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체 물량을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브랜드 관리에도 무척 민감하다. LG패션 이상호 과장은 "정상가에 판매하다 나중에 세일→행사→땡처리를 거치게 되면 장기적으로 브랜드의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며 "브랜드 관리를 위해 팔리지 않은 제품은 아예 소각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재고 의류를 해외에 기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부한 옷이 일부 업자들에 의해 다시 국내로 유입되는 경우도 있어 3년 정도 안 팔린 옷은 차라리 소각해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코오롱FnC는 작년부터 소각될 옷이나 잘 팔리지 않는 옷을 재가공하거나 색깔이나 디자인을 바꿔 다시 내놓는 '래코드' '리벌스' 등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를 통해 이 업체는 연간 40억원대이던 소각 물량을 줄일 수 있었다.

힘든 것은 유통업체들이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불황으로 할인 행사를 많이 열어야 하는 시기인데, 정작 마땅히 팔 물건이 없다"며 "그렇다 보니 '사계절 제품 판매' 등의 이름을 붙여 한여름에 겨울 옷을 팔기도 하고, 겨울에 여름 옷을 갖다 팔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