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박 당선인에게 쇠고기 전달 와카미야 기요시는 누구

입력 2013.02.10 14:16 | 수정 2013.02.11 17:51

직함은 프리랜서 언론인 아시아 각국에 넓은 인맥 ‘국제낭인’ 자처 막후 암약

일본 언론인 와카미야 기요시(위)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아래 사진 가운데).

지난 1월 24일자 조간신문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006년 5월 서울 신촌에서 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쇠고기와 함께 위로 서한을 보냈던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여기서 눈길을 끈 것은 서한 전달자였다. 당시 아베는 일본 내각부 관방장관이었다. 아베 장관은 테러 사건 열흘 뒤인 6월 1일쯤 박 당선인에게 편지와 함께 고베(神戶)산 쇠고기 20만엔어치 등의 선물을 일본 언론인 와카미야 기요시를 통해 전달했다고 한다.

아베 총리는 편지에서 “박 대표가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슬픔과 함께 근심이 돼 편지를 쓰게 됐다. 하루속히 회복해 정치활동을 재개하면 무척 기쁘겠다”며 “조기에 회복하길 기원하는 마음을 표하는 일본인들의 관습으로 편지와 선물을 전달한다”고 했다. 이 편지를 공개한 와카미야는 “두 지도자가 개인적으로 서한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라 앞으로 양국 관계를 잘 풀어갈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거물 은행가의 비서로 출발

이 보도를 계기로 ‘언론인’이라고 묘사된 와카미야 기요시가 누구냐가 화제가 됐다. 와카미야는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와카미야는 한국과 중국, 대만, 필리핀에서 두루 인맥을 구축한 인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막역한 사이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아는 사이다. 지난 1월 5일 참치 한 마리를 경매에서 18억원에 구입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초밥체인점 스시잠마이의 기무라 기요시(木村淸) 사장도 그의 지인이다.

저서도 ‘진상-북한 납치 피해자의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귀환했는가’ ‘중국인의 낯가죽’ ‘중국인의 99.9%는 일본이 싫다’ ‘코라손 아키노 투쟁에서 사랑으로’ ‘국제낭인·재미찾기 여행’ 등 아시아 관련이 많다. 와카미야는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계도 기웃거리고, ‘국제낭인’을 자처하면서 막후에서 암약하는 등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와카미야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정확하게 1년 전에 태어났다. 1949년 6월 25일이다. 일본 효고(兵庫)현 태생. 육상자위대소년공과(工科)학교를 졸업한 것을 보면 우익 성향이 엿보인다. 학력도 특이하다.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입학했고 대만의 동하이(東海)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돼 있다. 이집트 국립카이로대학에서 유학한 것도 나온다. 영어와 중국어가 능숙하다.

와카미야는 헤이와(平和)상호은행의 창업자이자 일본 정계와 두터운 파이프가 있었던 고미야마 에이조(小宮山英藏)의 비서를 하면서 인맥을 만드는 법을 비롯해 많은 것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이 필리핀인이다. 부인이 필리핀 정계 2인자와 친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키노와 절친, 암살 현장 지켜

그는 1983년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 암살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필리핀의 반체제지도자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을 통해 귀국하던 중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암살됐을 때 그는 동행 취재 중이었다. 그는 1980년 아키노와 인터뷰한 것이 인연이 돼 아키노를 ‘니노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 그는 반체제 지도자 아키노의 귀국을 말렸으나 아키노는 “귀국은 국민과의 약속”이라면서 귀국을 강행한다. 그는 아키노와 함께 미국에서 중화항공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갔다. 대단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키노가 암살되는 순간을 목격한 그는 일본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투성이 얼굴과 파마머리로 TV를 누볐고 이듬해부터는 니혼TV의 정규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아키노 암살사건은 필리핀 역사를 바꿨다. 장기집권 중이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됐고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됐다. 와카미야는 아키노 암살사건에 대해 책을 썼는데 암살사건 재심공판에서 재판부는 이 책을 증거로 채택했다.

아키노 사건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그는 일본 정계 입문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93년 총선에서는 일본신당 후보로, 1996년 총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모두 고배를 마셨다.

한동안 잠잠하던 와카미야는 2003년 북한 문제로 다시 한번 명성을 떨친다. 그해 12월 20일 북한의 정태화 북·일협상담당 대사와 자민당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澤勝榮) 중의원 의원과의 비공식 교섭이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남이었는데 중개한 사람이 와카미야였다.

2004년 4월 1일에는 집권 자민당의 야마자키 다쿠(山崎拓) 전 간사장과 히라사와 가쓰에이 납치구출행동의원연맹 사무국장이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 북한의 송일호 외무성 부국장 등과 이틀에 걸쳐 납치 피해자 5명의 북한 내 가족의 귀국 문제를 논의했다. 이것도 와카미야가 주선했다. 일본 정계와 외무성이 못한 일을 일개인이 해낸 것이다. 북한에 인맥이 많은 그는 북한 노동당 간부와 빈번하게 접촉했고 비자도 안 받은 채 북한에 몇 번이고 드나들었다. 그는 대만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수년 전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는 대만으로 날아가 재해의료 구원활동을 했다.

6년 전 그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신문 지면을 장식한다. 2007년 9월 25일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그해 7월 20일 오전 5시쯤 도쿄 세타가야(世田谷)구에 있는 31세 연하의 옛 애인 집에 무단침입해 현관의 우편물에 오물을 넣은 혐의였다. 그는 애인이 만나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스토킹을 한 혐의도 받았다. 그는 그해 12월 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스토킹 사건으로 언론 장식도

한·일 관계에서 막후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는 그의 행보는 왕년의 거물 세지마 류조(瀨島龍三·1911~2007)를 연상케 한다. 세지마 류조는 한·일 외교사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조정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세지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일본군의 패망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1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 귀국한 후 일본 굴지의 종합상사 이토추를 일궈냈다. 세지마는 ‘일본의 박경리’에 해당하는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의 대하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세지마는 와카미야와는 차이점이 있다. 한마디로 격이 다르다. 세지마는 상당수 한국의 대통령들과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었지만 와카미야는 그 정도는 안 된다. 한·일 관계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한국의 국력이 너무 약해서 일본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와카미야의 근황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지금도 어디선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상대로 막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것만은 분명하다. 박근혜 새 정부와 일본 간 인맥 구축에도 관심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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