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브레인 스토리'] [17] 기억은 소설을 쓰고 있다

조선일보
  •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입력 2013.01.28 23:30 | 수정 2013.03.05 11:43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2001년 9월 11일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알 카에다 테러범들이 운항 중이던 비행기 2대를 납치해 뉴욕 쌍둥이 빌딩에 충돌시킨 것이다. 잔인한 자살 테러를 수사하던 중 많은 용의자가 체포됐다. 그중 이집트 항공사의 조종사 한 명도 포함돼 있었다.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테러의 주요 용의자 모하메드 아타 역시 이집트인이었고, 조종사가 묵었던 호텔 방은 쌍둥이 빌딩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더구나 조종사가 전날 큰 가방을 들고 호텔 로비를 지나가는 걸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나타났다. 가방은 딱 레이저 추적 장비가 들어갈 만한 사이즈였다. 경찰은 비행기 조종 경험이 없던 테러리스트들을 지상에서 쌍둥이 빌딩으로 원격 가이드해준 장본인이 바로 그 조종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조종사는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중산층 가장(家長)이 테러단에 합류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조종사를 봤다는 증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100% 자신의 기억을 확신했던 증인은 오랜 조사 끝에 결국 예전 TV에서 본 비슷한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불행하게도 우리의 기억은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아니다. 하드디스크엔 정보가 입력된 그대로 저장된다. 하지만 망막을 통해서만 매시간 100기가바이트 정도 들어오는 정보량을 평생 지속적으로 입력하기엔 뇌의 저장량이 모자란다. 결국 우리의 경험은 보고 듣고 지각한 그 자체가 아니라 극도로 압축된 상태로 뇌에 저장된다. 이때 기억과 정보 압축은 해마라는 뇌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다.

    이때 특별히 집중하며 경험하지 않은 정보는 '제목' 위주로 압축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큰 관심 없이 TV를 보던 증인의 기억엔 '남자' '큰 가방' '호텔' 같은 식으로 제목들만 입력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입력된 정보를 다시 불러오면 우리는 예전에 경험했던 본래의 정보가 아니라 이미 제목으로 압축된 정보를 가져온다. 압축된 정보 사이의 구체적인 내용은 과거 경험이나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재생된다. 지난주 화요일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을까? 거의 한 시간 동안 무언가를 분명히 먹었을 텐데,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어제 회식자리에 같이 있었던 동료의 넥타이 색깔 역시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증인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면 우리의 뇌는 압축되었던 기억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재생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기억이 아니다. 단지 우리 뇌가 대부분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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