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두나씨는“나는 스타의 얼굴이라기보다 배우의 얼굴이다. 매력이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내가 쓸모없는 배우가 되면 어쩔 수 없죠. 배우로서 작품에는 최선을 다 하지만, 영화에서 안 불러주면 더 이상 미련은 없어요. 큰 욕심이 없어요. 항상 온몸을 다 해 사랑하는 영화에서 큰 상처를 안 받았으면 좋겠어요."

할리우드 대작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본 뒤, 배두나(34)씨가 세계적으로 팔릴 여배우가 될 것 같았다. 내 예감이 틀리는 경우도 많다.

톰 행크스ㆍ할리 배리 등과 공동 주연급으로 나온 그녀에 대해 "강렬한 인상" "경이로움 그 자체"라며 해외 언론은 호평했지만,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헐렁한 붉은색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자신이 영화배우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의심했다.

"제 마음은요, 내가 싫으면 말고, 영화에 대해 이렇게 쿨한 태도를 보이고 싶어요. 하지만 갈수록 영화에 빠져들어요. 영화를 그만두는 날이 두려워질 정도죠. 정말 영화와의 관계에서 파탄 나면 내가 큰 상처를 받겠구나 생각해요."

―배두나씨는 "내 이상형은 따뜻한 사람, 삶의 목표는 엄마가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배우 배두나와 여자 배두나 둘 다 가지면 안 돼요?"

―런던에서 함께 지하철 타고 라면을 먹었다는 박지성 선수는 '이상형'이 될까요?

"아이, 왜 여기서 박지성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우린 친구예요."

―영화보다 결혼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영화배우로서 아무리 명성을 떨친다고 해도, 선택한다면 엄마가 돼서 아기를 갖는 복을 선택할 거예요."

―다시 묻는데, 진심인가요?

"좋은 배우가 되려고 발버둥쳤는데 상처받을까 봐,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쳤는데 영화에서 너무 크게 상처를 받을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상처 안 받게, 아기를 '보험'처럼 갖고 싶다. 이런 말은 안 맞죠?"

이날 그녀는 좀 낙담해 있었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흥행은 저조했다. 전생(前生)과 후생으로 얽힌 여섯 개의 스토리로 구성돼 잠깐 한눈 팔면 관객은 겉돌 수가 있었다.

―구성이 복잡해서 흥미로운 영화였어요.

"바로 그 때문에 저도 흥미로웠어요. 세계적으로 관객들 반응은 호불호가 확실히 갈려요.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흥행이 안 좋고, 러시아에서는 '대박'이 났어요.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는 아직 개봉이 안 됐어요.메시지는 단순한데, 워쇼스키 감독님('매트릭스'를 연출)이 분장과 구성, 표현을 복잡하게 했어요."

―메시지가 결코 단순하지 않았는데.

"영화 속에서 제가 '사람의 삶은 자궁에서 무덤까지 타인과 연결돼 있고, 내가 지금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 대사가 아닐까요?"

―나는 영화평(評) 기사까지 보고 나서야 '아, 이런 영화였구나'알았어요. 배두나씨는 다음 생(生)에 어떻게 태어날 것 같아요?

"저는 윤회나 환생을 믿진 않아요. 하지만 사람의 만남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필연(必然)이 있다고 믿어요. 제 선택과 행동이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오늘 만난 것도 그렇다고 봐요."

―국내에는 배두나씨보다 더 예쁘거나 유명한 여배우도 있는데, 본인이 왜 할리우드 영화에 캐스팅됐을까요?

"제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은 흥행이 안 됐어요. 하지만 외국 유명 감독님들은 '고양이를 부탁해' '플란다스의 개' '복수는 나의 것' 등을 많이 보셨나 봐요.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공기인형(2009)'에도 제가 주연으로 출연했으니까요."

―일부러 작품성 위주의 영화를 골라 출연했나요?

"어떤 배우도 '작품성'만 갖고 영화를 택하진 않아요. 영화란 많은 관객이 보고 좋아해야 하거든요. 저는 재미있어 그런 영화를 택했는데, 막상 관객들은 그게 재미있다고 보지 않은 거죠."

―이번 '클라우드 아틀라스' 출연은 어떻게 제안받았지요?

"재작년 3월쯤 남북한 탁구 단일팀을 소재로 한 '코리아'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 혼자 탁구 연습을 하러 갈 때였어요. 제가 아는 감독으로부터 '누군가 너를 찾고 있다. 네게 시나리오를 보내고 싶어하는 미국 감독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제 손에 200쪽 대본이 건네졌어요. 제게 어떤 배역이 주어질지는 몰랐어요."

―시나리오를 보면서 본인이 짐작했던 배역은요?

"주연급인 '손미'역은 감히 그랬고, 그 친구인'유나'역을 맡을 줄 알았어요. 영화에서 중국의 유명 배우 저우쉰(周迅)이 맡았던 배역이지요.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손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워쇼스키 감독님과 화상 미팅을 할 때까지 '손미'역할이 비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컴퓨터로 화상 미팅은 어떻게 했지요?

"워낙 유명한 감독님이라, 저는 팬 미팅 하는 심정으로 '매트릭스를 너무 좋아해요'하며 푼수를 떨었어요. 고교 때까지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해서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그 뒤 '오디션 테이프'를 제작해 보냈다고 들었어요.

"이게 할리우드식인데, 유명 배우도 자기가 안 해본 배역이면 오디션 테이프를 만든다고 해요. 어쨌든 그 주문을 받고 황당했어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집안에서 오빠가 제 상대역을 해주면서 캠코더로 찍는 촬영기사도 했어요.웃겼죠."

―어떤 분장을 하고?

"감옥에 있다가 심문받는 장면인데, 그냥 티셔츠만 입고 했어요. 메이컵도 안 했어요. 이 얼굴을 꾸며봐야 얼마나 예뻐지겠어요. 어차피 제 얼굴이나 스타일을 보고 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봤어요."

―훌륭한 배우의 잣대는 배역을 어떻게 잘 해석하고 소화해내느냐에 달린 거겠죠?

"저는 아직 해석할 줄 몰라요. 본능에 더 충실한 편이에요. 시나리오를 보고 직감적으로 느끼는 대로 하고, 나머지는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요."

―배우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지요. 영화마다 배역이 바뀌고, 그때마다 주어진 배역에 몰입해야 하지요. 약간 미치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든 작업이지요.

"저도 그런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코리아'에서 냉정한 북한 탁구선수를 맡다가 이틀 뒤에 '손미'역을 촬영하러 갔으니까요. 캐릭터를 왔다갔다하면서, 감정의 기복도 심하죠. 하지만 이런 삶이 점점 익숙해져 가는 건 틀림없어요."

―삶의 상처가 많을수록 좋은 여배우가 된다는 말이 있지요?

"글쎄요…, 사생활에 대해 말 안 하면 안 돼요? 저는 눈물이 나오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요. 기쁘면 기쁨을 표현하지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누구에게 마음을 안 준다거나 기대를 접거나 그렇게 살지는 않아요. 차라리 유치할지언정, 어른답게 딱딱하게는 안 살려고 해요."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없는 날은 어떻게 보내죠?

"집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어요. 그냥 빈둥거린다는 말이 맞아요. TV도 잘 안 봐요. 집에서 단조로우니까 촬영 현장에 가면 에너지가 넘쳐요."

―'클라우드 아틀라스' 배역 오디션을 보기 위해 혼자서 시카고로 갔다면서요?

"워쇼스키 감독님의 사무실이 시카고에 있어요. 보내준 비행기 티켓으로 혼자 갔어요. 저는 일에서는 신중해요. 캐스팅될 때까지 얘기를 안 했어요. 안 되면 창피하기도 하고, 왜 얘기해요. '그냥 가서 구경 잘하고 와야지'하는 마음으로 가방 하나 메고 갔어요. 공항에 내리니 픽업을 나왔더군요. 호텔까지 다 잡아줬어요. 다음 날 오디션을 봤죠."

―당돌한가, 배짱이 좋은가요?

"나중에 '너가 무슨 야생녀냐'하는 말도 들었어요. 만약 매니저를 데리고 가서 떨어지면 더 창피하죠. 저는 주위 사람에게 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촬영에도 가능하면 NG를 안 내고, 프로답다는 소리를 들어야죠."

―유명 감독 앞에서 오디션을 볼 때 주눅들지는 않았고요?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봐요. 왜 주눅이 들어요? 감독님 앞에서 내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죠. 저는 밑져야 본전이죠. 다른 여배우들과 경합하는 줄 알았는데, 저 혼자 오디션을 봤어요. 감독님이 '빨리 말해 볼래''슬프게 해봐''화나서 말해 봐'주문할 때면. '오케이, 아일 트라이'하며 흥겹게 응답했어요. 오디션이 끝난 뒤 감독님이 '너랑 빨리 영화 찍고 싶다'고 말해줬어요."

―영화 촬영은 베를린에서 넉 달 동안 했고, 그때도 혼자 갔다면서요?

"제가 모르는 현장인데, 혼자 가야 그들 세계에 빨리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첫 한 달은 조심했어요. 어떻게 무례하지 않게 접근하느냐. 이들의 문화를 지켜봤어요. 우리 집이 아니니까요."

―활달한 성격 같은데 조심성이?

"저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무척 싫어해요. 남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싫고, 마찬가지로 제가 남에게서 침해를 받는 것도 싫어해요. 개인주의라고 할까요. 촬영 과정에서 제가 영어가 서툴러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어요. 영국식 영어를 개인교습 받았고 종일 대사를 외웠어요."

―워쇼스키 감독은 배두나씨에게 어떤 주문을 가장 많이 했나요?

"워낙 디테일하게 주문을 많이 했어요. 한 커트당 열 번을 다른 식으로 찍었어요. 저는 감독님과 마음이 잘 통했어요. 어떤 장면에서 울면 안 되는데 울고 싶어졌어요. 그 순간 '두나, 여기서 눈물을 흘려볼까'주문했어요."

―할리우드 스타인 톰 행크스와 할리 베리와 함께 찍으면서 무엇을 느꼈나요?

"촬영 장면이 달라 많이 볼 수는 없었어요. 다만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에게 '매너'를 배웠어요. 톰 행크스는 감독의 반복 촬영 요구에도, 지쳐서 신경질을 낼 만한데도 '아이 캔 두 잇(내 할 수 있어)'했어요. 그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요. 자신의 연기에 책임을 지는 프로였어요. 스태프들에게도 잘했어요. 할리 베리도 그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울 수 없어요. 함께 찍는 배우들 간에 시기나 질투, 경쟁 심리는 없었어요. 인간적으로 저러니 톱스타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배두나씨는 스스로 여배우의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스타의 얼굴이라기보다 배우의 얼굴이죠. 제가 못생겼나요? 매력 있잖아요."

그녀는 자신에 대한 답(答)을 잘 알고 있었다.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을 시작한 그녀는 1999년 '링'으로 데뷔했다. 우물에서 나오는 귀신 역할이었다.

■조선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신문 제작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투고와 제보는 연락처를 기재해 아래 주소로 보내주십시오. '발언대' 원고도 환영합니다.
우110-604 서울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414 조선일보사 독자서비스센터
이메일 opinion@chosun.com
fax 02)724-6299 ☎02)724-62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