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식 베이징 특파원

2000년대 초반 한국 의류업체 이랜드는 중국 시장에서 고민이 적잖았다. 점포 수가 빠른 속도로 늘고 옷이 잘 팔리는데도 중·저가 브랜드였던 탓에 수익성이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이랜드가 내놓은 전략이 백화점 입점이었다. 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의 유명 백화점에 이랜드 매장이 하나 둘 들어섰다. 초기에는 값비싼 임대료가 버거웠지만 백화점 입점을 통해 고급 브랜드로서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다. 이랜드가 지난해 6000개에 가까운 중국 내 점포에서 2조원의 매출을 거둘 정도로 성공한 이면에는 이런 과감한 전환이 있었다.

또 다른 중국 진출 성공 사례로 꼽히는 파리바게뜨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파리바게뜨는 2004년 중국에 진출하면서 상하이의 대표적 외국인 밀집 거주지인 구베이(古北)에 1호점을 열었다.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상당수 중국인은 지금도 파리바게뜨를 유럽의 유명 브랜드로 생각하고 있다.

2012년은 중국 시장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에 참담한 한 해였다. 삼성과 현대자동차를 제외한 상당수 대기업이 부진을 면치 못했다. 주력 제품의 판매 부진으로 주재원이 대거 철수한 곳이 있는가 하면, 수년째 제대로 된 투자처를 찾지 못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곳도 나왔다. 우리 대기업의 부진에는 중국의 경기 침체가 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속도 경쟁에서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중국 시장은 중국 국내 기업은 물론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것저것 재느라 시기를 놓치면 경쟁 대열에서 탈락한다.

한국 대기업의 오너 경영 체제는 신속한 의사 결정이 장점이다. 삼성·LG 등이 일본 전자업체를 뛰어넘을 때도 이런 장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서는 이런 체제가 오히려 약점이 되고 있다. 오너는 중국 시장에 어두워 결단을 주저하고, 현지 최고경영자(CEO)는 책임 추궁을 우려해 소극적 경영으로 일관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5t 트럭 두 대분의 보고서를 쓰고도 제대로 된 투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이 이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

중국 기업의 빠른 성장도 우리 대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휴대폰이든 가전제품이든 범용 제품으로는 중국 기업을 이길 수 없다. 중국 기업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로 승부해야 한다.

현지화를 통해 중국 시장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보다 '관시(關係)'에 기대 문제를 풀려는 경향도 우리 대기업 중국 경영의 문제점으로 꼽힌다. 최근 만난 샹빙(項兵) 장강상학원(長江商學院) 원장은 "'관시'만 쌓으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범하는 가장 큰 실수"라고 했다. 이랜드와 파리바게뜨는 몸으로 부대끼면서 중국 시장의 호흡을 체득하고, 중국 기업들이 따라오기 힘든 경쟁력을 갖춘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우리 대기업들은 이런 중견기업들로부터 한 수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