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10일 새벽 황해북도 사리원 인민위원회에 괴한 31명이 나타났다. 건물 주변에는 무장한 노농적위대와 사회안전원 수십 명이 지키고 있었다. 괴한들은 총격을 퍼부으며 건물 1·2층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12명이 죽고 40여명이 다쳤다. 괴한들은 트럭을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날이 밝자 남한 특공대 소행이라는 소문이 좍 퍼졌다.

▶괴한들은 북한이 남한 침투 게릴라전을 벌이려고 키운 124군 부대 2400명 중에서 뽑은 최정예 대원이었다. 청와대 습격을 앞두고 건물이 비슷하게 생긴 자기네 인민위원회를 상대로 실전 훈련을 한 것이다. 이들은 극한 훈련을 겪어낸 살인 병기였다. 40㎏ 군장 메고 한 시간에 12㎞ 달리기, 무덤 파고 들어가 시체와 함께 숨어 있기, 혀를 문 채 자기 턱을 올려쳐 자결하기….

▶1월 21일 일요일 밤 10시 15분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경복고 후문 앞길에서 총성이 울렸다. 북한 게릴라를 가로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곧이어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장병과 게릴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은 민간인이 탄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까 넣었다. 조명탄으로 하늘이 대낮처럼 밝았다. 시민들은 콩 볶는 총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격전 끝에 게릴라 29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고 한 명은 북으로 달아났다. 우리 쪽에선 민간인 5명을 포함해 30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했다.

▶1968년은 6·25 이후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한껏 치솟았던 해였다. 1·21 사태 이틀 뒤 미군 정보수집함(艦) 푸에블로호가 납북돼 미 항공모함이 동해로 출동했다. 10월엔 124군 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으로 침투해 양민을 학살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 1·21 사태를 기억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북한에 대한 복수를 벼르며 훈련시켰던 실미도 특수부대원을 반공 정권의 희생자로 묘사한 영화는 있어도 1·21 사태를 되비춰본 영화는 없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같은 일이 벌어져도 북한을 비난하면 오히려 낡은 사람 취급받는 세상이다. 1·21 사태를 겪었던 세대는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 세월에 풍화(風化)돼 바랬다.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주도 세력들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그 순간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애쓴 탓일 것이다. 위기에서 배우지 못한 국민은 언젠가는 다시 위기의 시간을 맞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