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한우의 聽談(청담)] 한국정치 산 증인, 남재희 前 노동부 장관 "민주당, 멘붕 빠질 필요없다"

조선일보
입력 2013.01.19 03:04 | 수정 2013.01.20 07:33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야당이 졌다고? 이만하면 선전했다고 보고 대책을 찾을 때 대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야당이 졌다고? 이만하면 선전했다고 보고 대책을 찾을 때 대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정확히 3년 전인 2010년 1월 시사평론가 정관용씨가 남재희 김종인 윤여준 이해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지략가 4인을 인터뷰한 '문제는 리더다'(메디치)라는 책을 냈다. 그때 남재희 김종인 이해찬 3인은 야권의 패배를 예상했고 윤여준은 정치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종인 이해찬은 각각 대선의 승리와 패배에 일정한 역할을 했고 윤여준도 야권에 베팅을 했으나 '오판'으로 드러났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만이 홀로 거리를 둔 채 야권의 패배를 진단했던 셈이다.

어느새 우리 나이 80을 맞은 남재희(南載熙)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20년은 언론인으로, 20년은 정치인으로, 20년은 정치관찰자로 살았지." 언론인 시절도 주로 정치부기자와 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있었으니 60년 가까이 한국정치의 안팎을 살피고 겪어온 산증인이다. 최근에는 한 시사월간지에 인물탐험 연재를 시작했다. 1월호에는 역대 대통령과 얽힌 이야기를 썼다. "2월호에는 이병주, 3월호에는 선우휘를 쓸 예정"이라고 했다. "어이, 나 같은 일수거사(一水去士·한물간 사람)한테 뭘 들을 게 있다고"라며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던 당대의 문사(文士) 남재희는 정작 16일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마주 앉자마자 대하소설 같은 '격동 60년'을 술술 풀어냈다. 그는 '3만권 장서가'로도 유명하다.

이보게 야권, 대선 비긴거야

3년전 野 패배 족집게 예측
문재인은 참 선전했어 보수에 저항감 안줬잖아
한국 정치는 지리학이야 박근혜가 되는 판이었어


◇ "이번 대선은 비긴 거다."

―이번 대선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

"우선 야당인 민주당한테 해줄 말이 있다. 이번 대선은 비긴 거다. 총선도 비겼고 대선도 비겼다. 괜히 패배 운운하며 '멘붕'에 빠질 필요 없다. 총선 때 야당의석 그 정도면 엄청난 거야. 우리 헌정사에서 야당이 그렇게 많이 나온 적 드물다."

―이미 3년 전에도 야당의 패배를 예견했다.

"이번 대선은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여당 후보인 박근혜가 이기게 돼 있는 판이었다. 첫째 엄청난 경상도 배경을 갖고 있다. 이회창의 경우 경상도 지지가 약하지 않았나. 한국정치는 지리학이야. 둘째 여전히 월남민과 그 후손들의 영향력이 강하다. 이들이 진짜 보수의 원류야. 1당10이야. 셋째 한국 프로테스탄트가 보수다. 이 세 가지 섹터만 봐도 우파인 박근혜가 되는 거다."

―민주당은 지금 패배의 후폭풍을 맞고있다.

"문재인 후보는 참 선전했다. 그는 보수층에도 저항감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당이 죽을 쒔다. 당이 뭐냐? 이해찬과 박지원이다. 이해찬은 안철수에게 한 방 맞고 나가떨어져 그 지모(智謀)를 발휘할 수 없었다. 박지원이야 검찰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뭘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당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란이라도 일어날 듯한 공분을 만들어줬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거다."

―민주당의 재건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내가 비겼다고 말하는 것에는 이번 대선이 진검승부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선 과정에서 어느 쪽 지지자건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없었던 것도 그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해보고 민주당이 나가자빠졌다. 여기에 재건의 단서가 있지 않을까? 다음 대선 때 누구를 내세워야 이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라. 현재로서는 잘 싸운 문재인을 다시 단련시키는 길 말고 누가 있을까?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문재인 때리기가 정도를 넘고 있다. 나야 문재인이라는 사람과 일면식도 없지만 길게 민주당의 생명력을 생각해 볼 때 문재인은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서…."


내 두딸은 反정부시위자
1981년 광주항쟁 1주년에 큰딸이 유인물 뿌리다 체포, 곧바로 사표냈는데 全대통령이 반려했지…
둘째는 DJ측근 아들과 결혼, 대통령에 ‘죄송’ 뜻 전하자 축하한다며 축의금 보냈어

◇아버지는 여당의원, 두 딸은 반정부 시위:"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


―대학을 6년 다녔다.

"서울대 의예과 2년 다니고 다시 법대를 갔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 하하."

―그런데 고시공부는 않고 언론과 정치의 길을 걷지 않았나.

"1957년에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이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친아들인 이강석의 부정 편입학에 반대해 동맹휴학이 있었는데 내가 학생총회 의장으로 그것을 주도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이 이 방향으로 오지 않았나 싶다."

―법대생이 고시공부도 안 했나.

"했지. 그해 늦여름 하숙비도 절약할 겸 고향 청주에 내려가 고시공부 하고 있는데 학생위원장 이강혁(동덕여대 총장 역임) 형이 당장 상경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이강석 부정편입학 문제가 언론에 보도돼 학교가 난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올라왔더니 자신은 이강석과 동성동본 동항렬이어서 앞장서기 곤란하니 나보고 학생총회 의장이 되어 동맹휴학을 이끌라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이미 초보적이긴 하지만 학생운동에 관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맡았다.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거지. 그래서 58년에 졸업을 했는데 신변이 불안했다. 동창들은 대부분 공무원이나 은행원을 택했는데 나는 권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곳이 어딜까를 생각하다가 신문사를 택했다."

―기자 남재희는 어땠나.

"4년간 한국일보에 있다가 조선일보로 옮겨 1972년까지 정치부기자를 거쳐 논설위원을 지냈고 그 후 서울신문으로 옮겨 1978년까지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했다. 특종을 많이 하는 기자라기보다는 좀 독특한 시각으로 기사를 쓰던 기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특한 시각이라는 게 진보성향을 뜻하나.

3만권 장서를 갖춘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남재희씨.
/조선일보 DB
3만권 장서를 갖춘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남재희씨. /조선일보 DB
"요즘은 진보니 좌파니 하는데 그때는 '혁신계'라는 말을 많이 썼다. 나도 영향을 많이 받았지. 특히 대학 때부터 만나보았던 조봉암을 개인적으로 좋아했는데 1959년 그가 간첩혐의로 사형당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전형적인 사법살인이었다. 이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그의 무덤을 찾았다. 2년 전 대법원에서 간첩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난 후로는 안 간다. 한을 어느 정도 풀지 않았겠는가?"

―어딘가에서 보니 이승만 전 대통령 추모행사에도 거르지 않는다고 하던데.

"50년대 후반에야 대학생뿐만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거부감이 대단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승만 박사는 새롭게 봐야 할 부분도 많고 개인적으로 이강석 편입학 반대 동맹휴학을 주동한 것에 대해서도 부담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이승만이 싫어서보다는 이강석이 이기붕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반대했던 심리가 더 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이승만 박사 행사에 꼭 참석하고 있다."

―걸어온 길을 보면 이승만과 조봉암을 동시에 추모하는 것과 같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면 모순돼 보이는 행적들이 적지 않다.

"내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좀 그렇다. 좌우의 양극을 피하고 비교적 온건한 자세를 갖자, 그러는 편이다. 그래서 이쪽저쪽으로부터 뜨뜻미지근하다는 비판을 받곤 했지. 그게 아마도 나의 6·25 체험과도 연결돼 있지 않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좌나 우에 희생당한 가족이나 친지들을 갖고 있다. 각자 다른 방향에서 한 맺힌 기억들을 갖고 있는 거지. 그런데 나는 무탈하게 6·25를 넘겼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모진 데가 없고 영어로 '이지고잉(easy-going)'하는 거지. 이건 지금도 나의 큰 약점이라 하겠다."

―80년대 여당인 민정당 국회의원일 때 두 딸은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골수 운동권으로 감옥까지 갔다.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다. 조물주가 볼 때 '이지고잉'하는 게 맘에 안 들었던 거지. 1981년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이던 첫딸이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대여섯명의 여학생과 함께 신군부 규탄 격문을 다량으로 찍어 캠퍼스에 뿌렸다가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 자녀의 반정부운동 첫 케이스였다. 미련없이 모든 자리의 사퇴서를 냈다. 그런데 정작 전두환 대통령이 '선거에 바빠 자녀들 잘 챙겼겠냐'며 사표를 반려하더라. 그런데 1년 반쯤 후에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둘째가 학생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성북경찰서에 체포됐다. 다행히 백방으로 뛴 끝에 겨우 구속은 면하게 했는데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둘째가 당시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의 측근인 재야인사 예춘호씨의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것 아닌가? 오해받기 딱 좋았다. 그래서 오랜 술친구 김종인 의원을 통해 당시 정무수석이던 정순덕씨를 만나 대통령께 죄송하게 됐다는 뜻을 전했다. 그랬더니 전 대통령은 '정치와 결혼이 무슨 상관 있나? 전혀 별개 아닌가? 혼사를 축하한다'는 전갈과 함께 최창윤 비서관을 통해 두둑한 축의금을 보내왔다.박정희 시절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

―두 딸은 지금 어떻게 됐나.

"큰딸은 미국에서 대학교수 하고 있고 작은딸도 외교통상부에 있다가 이화여대로 옮겼다."



1980년대 여당 속 야 의원
1984년 민정당사 점거때 학생들과 대화 시도했지 결국 모두 연행됐지만…
그때 당대표가 나더러' 재야에 있을 사람이 민정당에 들어왔다'더군

국방위 회식사건도 화제
軍 고위장성과 술자리 시비 벽에 폭탄주잔 집어던지자 소장급 장성이 나를 발로 차
당시 군부정권 아래에서 군인에 대든 의원 소문났지


◇"난 재야나 진보 쪽에 있었을 사람 아냐."


―민정당 의원 시절 최고권력에 반하는 주장으로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시위학생들에게는 그나마 의지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1984년 11월 김영춘(전 의원) 고려대 학생회장 등이 주동한 민정당사 점거농성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나는 무슨 모임 때문에 당사에 갔다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 농성이 장기화될 듯하여 근처 식당에서 친구 김종인 의원과 소주를 기울이며 시국 걱정을 하고 있는데 두 시간쯤 지났을까 사무처 직원들이 식당에 들어왔다. 학생들이 당 대표들과 면담을 요구해 다섯명의 명단을 통고했더니 '남재희가 안 끼면 안 만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 학생들도 내 딸들 이야기를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밤 10시쯤부터 학생들과 대화가 시작됐는데 두 시간 넘게 잘 진행됐다. 일부 공감도 하고 일부 억지 설득도 해가며. 그런데 접점을 찾아가던 중 경찰 쪽에서 내려오라는 거야. 강제진압 지시가 내려왔겠지.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았지만 결국 벽을 뚫고서 당사 9층 농성장으로 들어온 경찰병력은 순식간에 학생들을 모두 연행해갔다. 그때 권익현 대표가 나보고 그러더군. '혹시 남 의원이 학생들과 내통했던 거 아녀.' 심지어 우리가 '큰 누님'이라 불렀던 김정례 의원이 이런 말도 전해주더군. 권 대표가 어느 자리에서 나보고 '재야에 있어야 할 사람이 민정당에 들어왔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난 재야에 있었을 사람은 아냐."

―재야에 있었어도 될 것 같은데.

"그게 날 모르는 소리지. 내가 영어잡지들을 많이 받아봤는데 특히 진보성향의 국제문제 잡지나 서평전문지를 즐겨 읽었어. 그러니 모르는 사람들은 '남재희가 진보성향'이라고 단정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일본 좌익 잡지는 거의 안 읽어. 간혹 '세카이(世界)'를 보는 정도. 오히려 어릴 때 내가 영어책에 빠졌어. 고등학교 때 시골장터에서 우연히 두툼한 영어 소설 하나를 발견했지. 토머스 울프의 소설 '시간과 강'이었는데 여름방학 내내 고생한 끝에 독파를 하고 나니 영어에 대한 공포가 싹 가셨어. 파겁(破怯)한거지. 그때부터 영어로 된 책이며 신문 등을 많이 읽은 것이 알게 모르게 영미문화를 나에게 이식시켰던 것 같아. 다른 친구들은 일본어밖에 못 했거든. 나에게 영미 취향이 있는데 어떻게 진보로 쏠렸겠어. 균형잡기용이었겠지."

“예전 선배들에 비하면 지금 언론계나 정치권의 후배들은 너무 쫀쫀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요”라고 말하는 남재희 전 장관.
/허영한 기자
“예전 선배들에 비하면 지금 언론계나 정치권의 후배들은 너무 쫀쫀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요”라고 말하는 남재희 전 장관. /허영한 기자
―1985년 전두환 정권이 대학 탄압을 내용으로 하는 학원안정법을 만들려 할 때도 앞장서 반대했다.

"당시 청와대 참모인 한 기인이 이상한 법을 만들어 전두환 대통령을 등에 업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거대정당의 멀쩡한 의원들이 멸치 떼 쫓기듯 몰린 사건이 이른바 학원안정법 사태지. 전 대통령도 김정례 의원을 비롯해 호방하고 할 말은 하는 의원들 몇 명을 불러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당을 떠나시오'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었어. 내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지. 마침내 노태우씨가 대표의원으로 사회를 맡고 중집위원 서른 명쯤이 모여 회의가 시작됐다. 내가 처음으로 발언했지. 정 문제가 되면 사법부로 가면 되지 행정위원회라는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재판을 하게 되면 결국 우리나라는 재판 없이 인신을 강제하는 나라가 된다 뭐 이런 논리였던 것 같아. '전두환 친위대'가 벌떼같이 일어나 나를 공격했지. 공격이 끝나고 나서 내가 다시 발언권을 얻어 앞에 있던 현홍주 의원을 보고 말했어. 대학 후배니까. '중진국이나 선진국에서 학원안정법과 같이 인신을 재판 없이 행정조치로 강제하는 나라가 있습니까?' 현 의원의 답변은 간단했다. '없습니다.' 내심 이 법에 반대하고 있던 노태우 대표위원은 종회를 선포했어. 그로써 끝났지. 회의실을 나오는데 현 의원이 '남 선배, 하필이면 저에게…'라고 묻길래 '난 피처야. 내 공 받을 만한 캐처 가려가면서 공을 던져야지'라고 답해주었다. 그 후 현 의원은 프로필에 반드시 '학원안정법 반대'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데."

―국방위 회식사건을 빼고서 국회의원 남재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방위 회식사건이란 1986년 3월 21일 밤 서울의 요정 '회림'에서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고위장성 8명과 여야 국회총무를 비롯한 의원 10여명이 술자리를 갖던 중 시비가 붙어 여당의원이던 남재희 의원이 벽에 폭탄주 잔을 집어던지자 소장급 장성 한 명이 남 의원을 발로 강타해 실신했던 사건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군인에게 그 정도라도 대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의원이, 그것도 여당에 있다는 것이 알음알음으로 화제가 됐었다. 남재희씨는 2004년에야 '언론ㆍ정치 풍속사'(민음사)라는 책에서 사건의 소상한 전말을 소개했다.)

"그 시절 금배지와 별, 민군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그런데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의 요구로 이기백 국방장관과 박희도 참모총장이 사과하고, 폭력을 행사한 정모 참모차장은 예편됐고 이모 소장은 좌천됐어. 그것만으로도 획기적이었지. 게다가 나에게는 아무런 불이익도 없었어. 전두환 대통령이 일처리를 대단히 공정하게 했다고 봐야지."

그는 20년 가까이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털어놓지 않은 이유에 대해 "주도(酒道)"라고 짧게 답했다. 상대방이 피해를 보고 일단 화해를 했는데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더 이상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


인재발탁 수첩 ‘엔마쪼’
朴대통령과 술 함께 마실때 “국회에 각하의 집안이 다섯이나 있다” 비판했어
대통령이 언성 높였는데 한참 지나 선거때 날 썼지… 수첩에 내이름 올렸던게야

여의도에 주는 쓴소리
갈등, 순기능에 주목하라 덮는 것만이 통합은 아냐
법과 질서 만으로 문제 풀려고 해서도 안돼

◇남재희와 술


모순은 부조리한 현실이고 낭만은 그 현실을 피하는 기술이다. 그는 기꺼이 현실에 몸을 담았고 부조리함이 몰려올 때마다 낭만에 몸을 숨겼다. 낭만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이런 남재희를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의식은 야에 있으나 / 현실은 여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었으나 /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술 취해 집에 돌아가면 / 3만권의 책이 있었다.

법과 대학 동기인 / 아내와 /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당이다. 요즘도 술을 즐기나.

"요새야 많이 줄었지. 소주 한 병 반 정도."

―많이 마실 때는 어느 정도였나.

"소주병으로 계산하기는 그렇고. 24시간 넘게 마신 적이 있지. 국회의원 지낸 손세일,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했던 임재경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조선일보에서 함께 근무할 땐데 평소에도 자주 마셨지. 술값은 주로 경제기획원 출입하던 임재경씨가 촌지로 조달했고. 토요일 오후 6시 광화문 빈대떡 집에서 시작해 명동의 바로 옮겼지. 60년대는 살롱보다는 바의 시대였거든. 그리고 다시 밤새 영업하던 회현동 유엔센터로 가요.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가서 해장을 하고 두 사람이 우리 집엘 가자네. 엄처의 박대 속에 양주 좀 마시다가 쫓겨나듯 나와서 손세일씨집으로 갔지. 대접이 우리 집과 달리 극진하더라고. 한참 마시고 있는데 임재경씨가 달아나. 그래서 얼마 후 손세일씨와 나와서 또 다른 친구의 집을 쳐들어갔지. 근데 그 집엘 가보니 임재경씨가 어느새 합류해있는 게 아니겠소. 또 먹었지."

―술 때문에 정치도 시작했다던데.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을 땐데 박정희 대통령이 주요 신문 정치담당 논설위원들을 불러 종종 술을 함께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이 '기탄없이 이야기들 해보세요'라고 하길래 내가 그랬지. '국회에 각하의 집안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언성이 높아지더군. 다섯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린 거지. 8대 국회 때 조카사위 김종필, 그의 친형 김종익, 처남 육인수, 처조카사위 장덕진,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남편인 한병기 의원 이렇게 다섯명이었는데 특히 한 의원을 겨냥한 말이라는 것을 안 거야. '속초에서 그 애만 한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그런데 9대 국회에서 한병기씨와 장덕진씨가 빠지더니 10대 때는 김종익씨도 빠졌지. 돌이켜 보면 박 대통령 대단한 분이지."

-그게 본인의 정치참여와 무슨 관계가 있나.

"일본말로 '엔마쪼'라는 게 있는데 박 대통령의 엔마쪼가 당시 정관계에서 유명했지. 교사의 수첩과 같은 건데 일종의 비망록이야. 그날 나에 대한 인상이 엔마쪼에 올라갔던 거야. 그리고 한참 지난 1979년 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나를 찍어 정치에 참여토록 한 거야. 박근혜 당선인에게 비하하는 의미로 '수첩공주' 운운하는데 그건 박정희 대통령의 엔마쪼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하고 있다니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우리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매일 아침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서울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갈등의 긍정적 기능에 주목해야 한다. 갈등을 덮는 것만이 통합은 아니다. 둘째 인수위에도 그런 위원회가 있던데 '법질서·사회안전 위원회'라고. 그러나 법과 질서만으로 복잡 다양한 문제들을 풀려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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