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9월 9일 서울 중구 장충어린이야구장에서 열린 제28회 전국초등학교야구대회 4강전. 서울 성동초교와 경기 의왕부곡초교가 대결을 펼쳤다. 의왕부곡초 선발로 나간 투수는 12세였던 김상덕 어린이. 당시 최고 수준이던 성동초를 상대로 3이닝 3실점 호투했다. 하지만 결과는 4대3 패배. 공동 3위였다.

하지만 김군의 실력을 인상 깊게 본 대한야구협회 직원은 그를 '박찬호 야구 장학생'에 추천했고, 그는 전국 12명 안에 뽑혔다. 장학생으로 일주일간 미국 연수도 다녀왔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의 야구 경력이 됐다.

이후 그는 무릎에 '암(癌)'이 생겼다. 성장통인 줄 알았던 무릎 통증이 병원 검사 결과 뼈암인 '골육종'으로 밝혀졌다. 오른쪽 허벅지 뼈를 이식받고,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는 두 번의 대수술과 여덟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 치료를 담당한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성기웅(49) 교수는 "상덕이는 치료받으면서도 야구공을 놓지 않았다. '꼭 나아 최고 투수인 이상훈 선수처럼 되고 싶다'더라"고 했다.

수차례 수술 끝에 암은 완치됐지만, 목발 없이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성 교수는 "야구를 할 수 없다고 네 삶이 끝난 건 아니다. 암을 이겨냈으니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어떤 꿈을 갖고 살아갈지만 신경 써라"고 했다.

뼈암 때문에 다리가 불편해져 야구의 꿈을 접었던 김상덕씨가 뒤늦게 공부에 매진해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서울 강남구 삼성의료원 마당에서 야구공을 던지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이는 김씨 항암 치료를 맡아온 이 병원 소아청소년과 성기웅 교수다.

김군은 수술과 치료 탓에 남들보다 한 살 늦은 만 14세 때 중 1이 됐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야구부 활동을 해 책과 친하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다는 절박감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겨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면서도 친구 공책을 빌려 전부 외웠다. 면역력이 떨어져 학원에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강의 테이프를 반복해 들었다. 김군은 "중학교 입학할 때는 영어 단어를 읽을 줄도 몰랐는데, 졸업할 때는 조기유학 다녀온 친구들 수준으로 영어 회화가 가능했다"고 했다. 김군은 우수한 성적으로 과천외고에 진학했다. 김군 중·고교 시절 부모는 그를 매일 등·하교시켰다. 학교에서는 무조건 1층에 반 배정을 해줬다. 아버지는 좋아하는 술도 끊고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2006년 김군은 연세대 인문계열에 입학했다.

김씨가 대학생이 된 이듬해 아버지는 행정고시 준비를 권했다. "아버지는 제게 '넌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니 정부 기관에서 일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 말에 공감한 김씨는 2008년 3학년 때 행정학과로 전과했다.

김씨가 공부하는 동안 성 교수는 진료 차트에 '행정고시 준비 중'이라 써놓고 용기를 북돋았다. 2~3개월마다 있는 정기검진 때 "몸 상태는 어떻냐"는 질문보다 "공부 잘되냐"며 챙겨줬다. 성 교수는 "암을 앓는 아이들은 좌절감 때문에 빗나가는 경우가 많아 김군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주변의 도움 덕인지 김씨는 작년 11월 행정고시에 최종 합격했다.

김씨는 요즘 장애인·노인 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지만, 그들은 몸이 불편한 김씨가 봉사하러 오는 걸 부담스러워한다고 했다. 김씨는 "직접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