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을 표방한 에세이가 서점가를 점령한 해였다. 하지만 물밑에선 좋은 기획과 옹골찬 내용으로 무장한 양서(良書)들도 줄기차게 출간됐다. 조선일보 북스팀이 다독가(多讀家)로 소문난 전문가 4명에게 “올해 나온 신간 중 가장 아까운 책 한 권씩을 꼽아달라”고 주문했다. 내용이 형편없어 안 팔린 책이 아니라, 알차고 흥미로워 수만 부 팔릴 것으로 기대했건만 운때가 맞지 않아 덜 팔렸거나 홍보 부족 등으로 크게 빛 보지 못한 책. 안타까운 ‘알짜배기’ 책 4권을 ‘아깝다, 이 책!’으로 소개한다.

(왼쪽부터)김수영, 박덕규, 오영욱, 강유정.

[왜 우린 기쁨만 얘기하나… 슬픔을 치유하는 건 슬픔]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지음 | 김명숙 옮김|현암사|320쪽|1만3000원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a href= http://www.yes24.com/24/goods/6410013?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span><

슬픔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에 찾아온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마음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던 그 무엇 혹은 그 누구였을 것이다. 그가 떠났을 수도 있고 내가 떠나보냈을 수도 있으며, 잔인한 운명으로 사랑하는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득 나에게로 찾아온 슬픔은 쉽게 부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슬픔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슬픔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슬픔은 기쁨보다 우리의 영혼에 자주 나타나고 훨씬 오래 머무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슬픔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일이고 내면의 일이며 설명한다고 해서 타인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슬픔에 대한 이야기는 타인의 정서적 호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눈물을 글썽이며 늘어놓는 길고 긴 슬픈 이야기를 듣기 좋아할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밝고 희망과 힘을 주는 이야기를 반긴다. 결국 슬픔은 커져만 가고 진정한 위로는 드물다.

그래서 슬픔에 대해서 말하는 글과 책은 많지 않다. 때문에 이 책이 더욱 빛난다. 슬픈 일을 겪고 나서 슬픔에 빠졌다가 그곳으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오는 힘겨운 과정에 대한 스물아홉 편의 아름다운 산문을 엮었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세심한 성찰이 담겨 있다. 슬픈 마음을 단번에 치유할 수 있는 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 자신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따뜻한 위안들은 그 과정을 견뎌내는 데에 반가운 동행자가 될 수 있다. 슬픔은 기쁨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슬픔은 슬픔의 친구들 혹은 슬픔의 동료들로 위로받는 것이고 이를 통해 아주 천천히 나에게서 떠날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슬픔에 허락된 최고의 축복은 위안이다. '슬픔의 위안'을 권한다. /김수영·로도스 출판사 대표

[한국 문학 안 죽었다… '허리 힘'을 보여주마]

위풍당당
성석제 지음|문학동네|264쪽|1만2000원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a href= http://www.yes24.com/24/goods/6654897?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span><

성석제의 소설은 웃기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성석제의 소설은 희중비비중희, 그러니까 웃기면서 슬프고 슬프면서 웃긴다. 그런데 장편소설 '위풍당당'에는 지금까지 그의 소설에서 보기 힘들었던 강력한 감정 하나가 들어와 있다. 바로 고통이다. 시종일관 농담처럼 활활 날던 문체가 고통 앞에 가면 무게 추를 얹은 듯 진중하게 가라앉는다. "아오, 빡쳐" 같은 비속어가 달궈놓은 발랄한 분위기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엄마의 남자가 자신의 몸을 건드렸을 때 새미"의 이야기로 무거워진다. 사실, '위풍당당'은 제목과 다르게 여성 수난사이면서 고통의 연대기이다. 한편 고통받은 자들의 게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는 "신은 후대 사람들이 노래할 소재가 부족하지 않도록 불행을 만들었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이야말로 최고의 감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위풍당당'은 문학의 영원한 소재일 수밖에 없는 고통을 연민의 태도로 그려낸 소설이다. 안타깝게도 이 고통이 허구만은 아니다. 하지만 한편 그들이 만든 안락한 도피처, 강마을 역시도 허구만은 아니다. 위로보다 연민, 대개 좋은 문학이 그러하듯 '위풍당당'은 고통 속에서 연민을 길어낸다.

등단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성석제는 한국 문학의 중견이다. 어떤 예술 공간이건 중견이 버티고 살아남기가 더 힘들다. 독자와 비평가들은 신인 때의 패기를 여전히 기대한다. 원로가 되려면 일단 이 중견의 시간을 거쳐야만 한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한국 소설이 점점 줄어드는 지금, '위풍당당'은 소설가 성석제 그 자신에 대한 수사이기도 하다.

'위풍당당'은 한국 문학의 중견, 허리의 힘을 보여준다. 폭력과 눈물, 똥과 피로 얼룩져 있지만 수난당한 여자들의 신비한 치유력이 있는 곳, 강마을. 그곳은 팍팍한 우리 삶에서의 소설의 자리이며 얼룩진 독자들의 쉼터이다. 휴대전화도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는 그곳, 숫자와 정보에 지친 당신이라면 이 허구의 공간 '위풍당당'에서 잠시 쉬어 가도 좋을 것이다. /강유정 문학·영화평론가

['몸부림'으로 시를 쓴 김수영… 그의 '알몸' 벗긴 김수영 예찬자]

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 지음|천년의 상상|508쪽|2만3000원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a href= http://www.yes24.com/24/goods/6969274?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span><

우습게도, 철없던 시절 김수영 시 앞에서 친구들과 하던 물음을 다시 떠올려본다. 김수영이 자기 시를 신춘문예에 투고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답은 똑같다. 낙방이다! 요설적이다, 관념어가 많다 등의 이유가 지적됐을 법하다. '거대한 뿌리'는 당장 비속어 때문에도 외면당할 것이고, '달나라의 장난'도 '소시민의 엄살'이 과하게 비쳤을 것이다. 요새는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풀'마저도 어쩌면, 끝내 참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반어(反語)가 문제 되었을 것 같다.

그 무엇보다 김수영의 시는 우리 전통에서 시라고 말하기 힘든 것을 너무 많이 가진 시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 시사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김수영 시의 어떤 위대함 때문일까? 예전에 나는 잘 몰랐다. 장년이 되면서 조금 알아진 것 같은데, 좀 더 확연히 알게 된 건 '김수영을 위하여' 덕분인 듯하다. 김수영에게 시는 '연금술로서의 언어'가 아니다. 그에게 시는 철저히 삶을 위한 것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에게 함몰되지 않은, 그런 살아 있는 자유정신을 삶으로 실천하게 만들려는 것이 그의 시작(詩作)이고 시다. 그의 시가 어떤 체제나 이념의 자리에서 사유와 행동을 그 틀 안에 두려는 데 대한 알몸으로서의 저항을 상징하게 된 것도 이 지점에 있다. 모르긴 해도 시를 쓰면서 언어 문제에 대한 시달림을 극소화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주제를 창출한 시인은 김수영 하나뿐이지 않을까 한다. 그는 '온몸으로' 자유와 저항이라는 두 정신을 실천한 유일한 시인이다.

김수영의 이 정신을 실제 자기 삶의 방침으로 삼고 살아온 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유를 살고 노래하는 인문정신'을 강의하기 위해 김수영의 시를 택했다. 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존재를 모멸스럽게 하는 숱한 시간을 몸부림치며 지내온 시인의 삶이 속살까지 다 드러났다. 알고 보니 그 속살은 철학자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김수영 시의 '자유의 인문학'을 기리는 송가이자, 철학자 자신의 처절한 자기 확인이기도 하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나는 믿는다 '종이책 영원론'… 숱한 도서관들이 간증하니까]

도서관 산책자
강예린·이치훈 지음|반비|250쪽|1만6000원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a href= http://www.yes24.com/24/goods/7926835?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span><

나는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는 것에 내 책장 속 모든 책을 걸 수 있다. 하긴 종이책이 사라지면 내 책장 속의 책도 필요가 없게 될 일이겠지만.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사실 아날로그가 좋다. 손으로 만져서 물리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이 좋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처럼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에 집착하는 이들이 꽤 많이 존재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종이책의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종이책의 적은 디지털 문명이 아니다. 문제는 현재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이 상황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도서관이다. 일단 물리적인 공간이 확보되기에 갈 곳을 잃은 수많은 종이책을 수용할 수 있다. 그 후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도서관까지 끌어 들여와서 굳이 손으로 종이를 넘기게 한다.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볼 수 있는 것도 기어이 도서관에 와서 보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서관이 가고 싶은 장소가 되어야 한다. 도서관은 어느새 책의 저장고뿐만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가 되고, 기억을 생산하는 터전이 된다. 도서관 건축 및 프로그램이 중요한 이유다.

'도서관 산책자'는 아직 아날로그 문명을 버리지 않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물론 현대의 도서관들은 디지털 문명에도 순응해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책들이 모여 있다는 원초적인 느낌이다.

책벌레이면서 건축가인 두 저자는 우리나라의 여러 도서관을 다니며 그들의 시선을 기록했다. 그들은 아날로그를 신봉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도서관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느낄 수 있다. 그들 역시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자신들이 가진 모든 책을 걸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도서관은 결국 발로 걷고 몸으로 느끼며 손으로 만져야 하는 곳이라는 걸 말이다. /오영욱 건축가·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