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브레인 스토리'] [11] 4000원짜리 이데올로기

조선일보
  •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입력 2012.12.17 23:30 | 수정 2013.03.05 11:45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독일에서 오래 살았던 나에겐 2가지 의문이 있었다. 첫째는 '괴테·칸트·베토벤 같은 위대한 철학자와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나라가 어떻게 아우슈비츠·부헨발트·트레블링카 같은 수용소에서 600만명이 넘는, 그것도 바로 몇 달 전까지 옆집에서 의사·변호사·선생님으로 함께 일하던 유대인들을 마치 바퀴벌레같이 학살할 수 있었을까'였다. 둘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가 있는데 왜 여전히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였다.

첫째 의문에 대해선 여러 가지 정치·경제·역사·사회적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결국 사상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아름다운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이다"라고 했듯, 우리는 문화가 인류의 문명화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둘째 의문에 대해선 뇌과학적인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몇 년 전 한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2000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커피를 선보이며 같은 커피를 '2000원' '4000원'이라고 적혀 있는 두 개의 컵에 담아 맛보게 한 적이 있다. 두 컵의 커피는 화학적으로 동일했고, 혀에 느껴진 맛도 당연히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4000원짜리 커피가 2000원짜리보다 더 맛있다고 답했다. 그뿐 아니었다. "나는 맛에 민감한데, 4000원짜리는 설탕 없이도 단맛이 난다" "부드럽고 마시기 편하다" 등 상당히 구체적인 이유까지 들며 왜 4000원짜리 커피가 2000원짜리보다 더 맛있는지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사람들은 동일한 커피를 가지고 맛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일까?

뇌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실과 이미 내부적으로 우리가 가진 믿음을 적절히 조합해야 한다. 하지만 믿음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학에선 이럴 경우 믿음을 바꾸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뇌는 과학자가 아니다. 뇌는 지금 한순간 얻은 데이터보다 오래전부터 가진 고정관념을 더 신뢰하고 거꾸로 사실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현대인은 '비싼 게 더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같은 맛으로 느껴지는 두 개의 커피 중 4000원짜리를 선호하는 것이고, '독일은 문화국가' '일본 대동아공영권' '소비에트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믿는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시베리아 집단수용소' 같은 사실들을 무시한다.

불편한 사실보다 '4000원짜리 이데올로기'를 선호하면서 뇌도 무언가 찜찜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뇌는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수많은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변명이 길어지면 뇌 스스로도 믿음과 사실의 오차를 느끼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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